영화 ‘복수혈전’은 개그맨 이경규의 감독데뷔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992년 10월 개봉 무렵에는 ‘인기 개그맨 이경규 영화계 진출’ 등의 뉴스와 함께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요. 당시 이경규의 영화계 도전은 많은 매체들에 의해 보도됐으며, 동료 연예인들도 그의 도전정신과 용기에 응원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심과 열기는 영화 상영 2주쯤 지나면서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온 상당수의 관객들이 ‘썰렁한 반응’을 나타냈기 때문이었습니다. 흥미있게 관람한 관객들보다는 기대를 갖고 스크린 앞에 앉았다가 “어, 이게 아닌데”라며 실망하고 일어선 관객들이 더 많았던 겁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경규의 원맨쇼를 예상했던 것 같았습니다. 이를테면 홍콩배우 성룡의 코믹액션영화 같은 재미를 기대했던 거지요. 그런데 ‘복수혈전’은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비장감 넘치는 액션영화의 외피를 둘렀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다”는 관객들의 기대와는 동떨어졌던 색깔을 지닌 겁니다.
‘복수혈전’의 메인 포스터에서도 기획, 각본, 연출, 주연, 제작 등 1인 5역을 맡은 이경규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불끈 솟아오른 핏줄의 팔뚝을 앞세운 이미지가 전면에 내걸렸지요. 액션영화의 주인공다운 포즈를 한껏 잡은 것이었지요.
그 무렵 유행했던 홍콩 액션영화의 주인공들과 흡사했습니다만 대중은 오히려 그 모습을 낯설어 했습니다. 낯설다기 보다는 부담스러워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때가 이경규의 나이 서른 둘이었으니, 액션 히어로의 포스를 내뿜을 만 했습니다. 다만 개그맨이라는 이미지에 경도된 대중의 선입견이 이경규의 영화적 의도를 따라가지 못한 셈이지요.
'복수혈전'은 제법 진지한 액션영화로 만들어졌으나 관객들은 마치 성룡의 코믹액션영화쯤으로 기대했다가 오히려 실망감을 나타냈다. 영화 속의 태영(이경규, 사진 오른쪽 뒷편)이 운영하는 디스코텍 장면.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관객과의 괴리감이 보였습니다. 주인공인 태영(이경규)이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카메라는 롱쇼트에서 바스트 쇼트로 옮겨지면서 교도소 담장에 기대어 쓸쓸하게 담배를 피워무는 모습이 무척이나 진지하게 그려졌습니다. 그런데 이 진지한 장면에서 그만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린 겁니다.
과거엔 건달이었으나 의동생 준석(김보성)과 함께 디스코텍을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려는 태영이 마약조직의 부당한 협박에 맞서 싸우는 내용이 영화의 주된 스토리였습니다. 이런 스토리 라인은 자연스럽게 홍콩 느와르영화 ‘영웅본색’ 등을 연상케 합니다만, 관객들은 홍콩 느와르영화를 볼 때와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복수혈전’을 바라봤습니다.
그래서 긴장이 고조되어야 하는 장면이나 분노를 터뜨리게 되는 장면 등에서 이경규의 연출의도와는 달리 관객들은 마치 코미디를 보는 듯 깔깔거렸던 겁니다. 사실 영화에서 보여진 이경규의 액션연기는 웬만한 무술전문배우 못지 않았습니다. 쿵푸 4단의 실력이 영화 곳곳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하지만 액션장면이 아닌 장면에서 는 약간의 과장된 몸짓이나 대사에도 관객들은 여지없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 의동생 준석(김보성)이 죽음을 당했을 때, 그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장면에서는 눈시울을 적시는 게 아니라 실소하는 관객들이 더 많았을 정도였습니다.
하기는 이경규의 인맥으로 인해 ‘숭구리당당’의 개그맨 김정렬을 비롯해 MC 임백천, 탤런트 손지창 김찬우 등이 특별출연한 것도 관객의 웃음폭탄을 유발한 요인이 되기는 했지요.
'복수혈전'의 액션장면에서 이경규는 쿵후 4단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런 현상에는 비평가들의 혹독한 평가도 한 몫 했습니다. 개그맨의 영화계 도전에 대한 편견도 다소간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 일본의 코미디언 출신의 명감독 기타노 다케시처럼 되고 싶다는 야심을 여러차례 밝혔는데, 국내의 비평가들은 오히려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연출과 연기, 내러티브 등의 모든 부분에서 가혹하리만치 비판의 수위를 높였습니다.
흥행실적도 당연히 저조했습니다. 개봉 무렵 쏟아지던 미디어의 관심과 대중의 호기심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봄눈 녹듯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인기 개그맨 이경규의 영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극장에 가려던 관객들조차 “영화가 별로”라는 입소문에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로 인해 ‘복수혈전’은 이경규의 대표적인 실패작으로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당시의 물가에 비춰 작은 빌딩 한 채 정도 살 수 있었다는 5억원의 제작비를 들였던 이경규로서는 이만저만한 경제적 손실이 아니었지요. ‘복수혈전’ 이후 그는 밤업소 출연 횟수를 크게 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복수혈전’의 실패가 이경규의 인기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여전히 ‘일요일 일요일 밤에’(MBC TV)의 ‘몰래 카메라’를 통해서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재미와 웃음을 계속 안겨줬으니까요. 이경규 때문에 ‘몰래 카메라’를 본다는 시청자들이 적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몰래 카메라’는 이경규의 존재감으로 인해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그 정도로 ‘몰래 카메라’에서의 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복수혈전'의 실패 후, 15년만에 다시 '복면달호'(2013년 김상찬 감독)의 제작자로 무대에 오른 이경규.
그래서였을까요. 이경규는 ‘복수혈전’의 실패를 오히려 자신의 개그 소재로 곧잘 써먹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또한 주효했습니다. 스스로 먼저 ‘복수혈전’의 폭망 스토리를 꺼내놓는가 하면, 또 그걸 화제삼아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치 커다란 트라우마라도 되는 양 엄살을 부렸습니다. 대중은 이처럼 이경규의 속상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며 또 즐거워했습니다. 사실은 대중이 속아 넘어간 거였지요.
‘복수혈전= 이경규의 폭망영화’라는 등식은 어쩌면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개그적 소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복수혈전’의 실패 이후, 밤업소를 죽어라 뛰던 그 시절에 이경규도 “다시는 영화 안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선언적 제스처 또한 “언젠가 꼭 영화로 승부하겠다”는 야심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재학시절부터 그의 꿈은 영화감독이었습니다. 당시 그와 함께 동국대를 다녔던 2년 후배 최민식도 그의 영화열정을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경규가 ‘복수혈전’을 폭망하고 몇 년쯤 지난 후, 다시 ‘복수혈전2’를 기획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자신을 캐스팅할까봐 한동안 이경규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우스개소리를 털어놓기도 했지요.
'복수혈전'의 메인 포스터로 사용된 이경규의 포즈. 그러나 관객들은 이글거리는 눈빛과 핏줄 선 팔뚝 등의 이미지를 다소 부담스러워했다.
'복수혈전' 메인 포스터
영화에 대한 그의 집념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입니다만 그는 실제로 ‘복수혈전’ 이후 무려 15년이 지나서 영화 ‘복면달호’(2007년, 김상찬 감독)의 제작자로 다시 나섰습니다. 코미디 영화에서 승승장구하는 차태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복면달호’는 그야말로 그의 집념이 만들어낸 작품이었습니다.
‘복면달호’의 개봉에 앞선 시사회 무대에 오른 이경규는 감격적인 표정으로 “영화계로 다시 돌아오는데 15년 걸렸다”는 소회를 밝혔습니다. 스스로 ‘복수혈전’의 실패를 개그적 소재로 삼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사실은 얼마나 마음의 응어리가 있었는지 드러낸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경규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을 활짝 펼쳐보이며 “나, 죽지 않았어!”를 외치는, ‘복수혈전’을 비웃던 과거의 사람들을 향한 일갈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복면달호’는 ‘복수혈전’의 실패를 답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대박이 난 것은 아니었고, BEP(Break Even Point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상징적인 성공’을 거둔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큰 실패를 겪었던 그 길에 도전장을 내밀어 얼마간의 성공을 거둔 이경규로서는 ‘영화계 진입’의 동력을 다시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향한 그의 용기와 집념 역시 ‘복면달호’에서 멈추지 않았던 겁니다.
그로부터 6년 후인 2013년에는 김인권을 주인공으로 한 ‘전국노래자랑’(이종필 감독)이라는 영화를 또 내놓았으니까요. 비록 ‘전국노래자랑’은 ‘복면달호’ 만큼의 흥행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는 지금도 또 다른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수많은 시나리오들을 만지작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경규는 분명 영화인입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이전글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