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중반, 만화잡지 ‘아이큐’에 연재되던 ‘진짜 사나이’(박산하 작)는 청소년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박산하 작가 자신이 학창시절에 겪은 일들과 기대했던 일들을 담아낸 ‘진짜 사나이’는 연재 이후 단행본으로 출간되어서도 200만부나 팔려나갔을 정도로 인기를 모았습니다.
푸른 꿈을 안고 진학한 고등학교에서 주인공 제갈길이 불합리한 학교의 시스템에 저항하고, 부당한 학원폭력을 무찌르면서 친구들과의 우정을 지켜나가는 게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청소년들의 이야기였으므로 여선생님에 대한 호기심이나 여학생들과의 풋풋한 사랑도 간간이 등장했습니다만 당시 청소년들이 선망하고 동경하던 것들을 대리수행하는 제갈길은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떠올랐습니다.
제갈길의 폭력은 정당했고, 우정을 지키려는 노력은 감동마저 자아냈습니다. 간혹 어른들의 과도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거나 기성세대의 견고한 벽으로 인해 좌절을 겪기도 하지만 꿋꿋이 딛고 일어서는 성장통은 동시대 청소년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진짜 사나이란 이런 것‘이라는 개념을 심어주었다고나 할까요. 그동안 ’진짜 사나이‘라고 하면 그저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으로 시작되는 군가 정도로만 알고 있던 대중에게도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한 셈이었지요.
요즘에도 TV의 예능프로그램으로 ‘진짜 사나이’가 화제를 낳으며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만 그 당시에도 ‘진짜 사나이’라는 뉘앙스와 그 매력을 스크린으로 옮겨보겠다는 시도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영화 ‘진짜 사나이’(1996년, 박헌수 감독)였습니다.
오죽하면 ‘진짜 사나이’의 영화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만화 ‘진짜 사나이’가 원작인 것으로 오해되었겠습니까. 이 때문에 영화제작사(익영영화사)는 영화제작 발표회때부터 ‘진짜 사나이’가 만화와는 전혀 별개의 작품인 것을 애써 강조해야 했지요.
그도그럴 것이 제작사에서는 ‘진짜 사나이’의 각본과 연출을 맡긴 박헌수 감독에 대한 기대감이 잔뜩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만화와의 차별성을 전면에 내세워야 할 상황이었지요.
'진짜 사나이'의 주인공 '그녀' 역의 서미경(왼쪽)과 '사나이' 역의 권해효(오른쪽).
박 감독은 90년대 최고의 로맨틱코미디 영화로 평가받는 ‘결혼 이야기’의 시나리오작가 출신입니다. 비록 감독 데뷔작인 ‘구미호’가 실패했지만 2년여에 걸친 박 감독의 와신상담을 지켜본 제작사는 “드디어 터질 때가 왔다”며 박 감독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겁니다.
실제로 박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꽤나 유니크한 로드무비 형식을 띠었습니다. 그동안 한국영화에서는 결코 본 적 없었던, 의도적인 유치찬란함으로 가득했습니다. 시나리오에서 좌충우돌하는 캐릭터들도 하나같이 독특했습니다. 그럴 듯한 이름 대신 ‘사나이’거나 ‘그녀’, 혹은 ‘빨노파’(빨강 노랑 파랑)나 ‘라이방’ 등으로 불렸습니다.
미국 할리우드영화 시스템의 전형적인 ‘B무비’(메이저 영화에서 표현하지 못하는 자유로운 창작정신과 자본에 종속되지 않는 저예산영화를 일컬음)와도 같았습니다.
캐스팅도 일반적인 방식을 지양했습니다. 정상급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대신 역발상으로 연기력이 검증된 연극배우들을 대거 기용했습니다. 주인공 ‘사나이’에는 오랫동안 대학로 연극무대에서 다양한 연기경력을 쌓아온 권해효를 캐스팅했고, 여주인공 ‘그녀’ 역은 수십여 명의 후보연기자들을 오디션한 끝에 미스코리아(강원 진) 출신의 서미경을 발탁했습니다. 방송사 리포터를 몇 차례 해봤을 뿐, 연기라고는 전혀 경험이 없는 완전 생짜 신인이었습니다.
'진짜 사나이'에는 연극배우들이 주요 배역을 맡았다. 뒷줄 왼쪽부터 박광정, 이두일,김학철,권해효. 그리고 두 여배우, 서미경(왼쪽)과 주정은(앞쪽).
남녀 주인공 외에도 대부분의 주요 배역이 연극배우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이호성(빨강) 이두일(노랑) 故 박광정(파랑), 김학철(망치), 정원중(그림자), 명계남(강사), 주정은(아베마리아) 등이 그들이지요.
박 감독과의 친분으로 우정출연한 배우들의 면면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얀전쟁’(1992년, 정지영 감독)을 비롯해 ‘그 여자 그 남자’(1993년, 김의석 감독) ‘세상 밖으로’(1994년, 여균동 감독) ‘손톱’(1994년, 김성홍 감독), ‘테러리스트’(1995년, 김영빈 감독) 등 쟁쟁한 영화에서 주연으로 활약해온 이경영이 라이방‘ 역으로 나왔고, ’구미호‘(1994년, 박헌수 감독)와 ’꽃잎‘(1996년, 장선우 감독)에서 열연한 안석환이 ’소녀 아버지‘로 출연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년, 홍상수 감독)과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1995년, 김동빈 감독)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김의성이 ’질투하는 남자’로 등장했습니다.
'진짜 사나이'의 제작사는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서울 종로의 피카디리 극장 앞 광장에서 제작발표회를 가졌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자동차에 올라 포즈를 취하는 주요 배우들. 왼쪽부터 서미경, 권해효,김학철, 주정은, 이두일.
주인공 ‘사나이’(권해효)는 무능력한 자동차 세일즈맨입니다. 거리에서 불량배들과 시비붙어 얻어맞는가 하면, 자동차 세일즈 재교육장에서는 한눈 팔다가 ‘강사’(명계남)에게 야단맞고 얻어맞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던 중 강의실 바깥에 주차되어 있는 오픈카를 보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그 차를 몰고 달려나갑니다.
‘사나이’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우동을 팔고 있던 ‘그녀’(서미경)가 사내들에게 희롱당하는 걸 보고 얼떨결에 끼어들어 사내들을 무찌릅니다. 이를 지켜보던 ‘그녀’는 ‘사나이’에게 끌려 우동냄새 찌들은 유니폼을 집어던지고 따라나섭니다.
교통경찰 ‘라이방’(이경영)을 따돌리고 통행세도 내지 않고 무한질주하는 ‘사나이’와 ‘그녀’. 그리고 운전해보고 싶어하던 ‘그녀’가 핸들을 잡았다가 ‘빨노파’ 일당의 차와 부딪치는 사고를 일으킵니다. 그러자 자신들을 무시했다며 총을 들이대는 ‘빨노파’ 일당.
그러나 ‘라이방’의 출현으로 ‘빨노파’는 고장난 자신들의 차를 놓고, ‘사나이’의 차를 빼앗아 달아납니다.
‘빨노파’의 자동차 트렁크에 실려있는 총을 발견한 ‘사나이’와 ‘그녀’는 바닷가로 나가서 실컷 총을 쏘면서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날려 보냅니다. 이러는 와중에 ‘빨노파’를 쫓는 ‘망치’(김학철) 일당이 들이닥쳐 ‘그녀’를 납치하면서 ‘빨노파’의 목을 찾아오라고 협박합니다.
망치에게 납치된 ‘그녀’를 구하려는 ‘사나이’는 ‘빨노파’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사나이’와 ‘빨노파’는 함께 힘을 합쳐 ‘망치’의 본부인 교회당으로 쳐들어가 요란한 총격전을 펼칩니다.
무능력한 자동차 세일즈맨 '사나이'(권해효)와 우동집 판매여사원 '그녀'(서미경)는 억압된 일상에서 벗어나 무한질주를 거듭한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듯 영화는 내러티브에 치중하는 대신 캐릭터를 개성적으로 드러내는 데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이른바 ‘캐릭터 무비’였습니다. 독특한 캐릭터들이 잔뜩 등장했지요.
하지만 이 캐릭터들은 독특하다기 보다는 어딘가 좀 모자라거나 지나쳐 보였습니다. 이들이 펼쳐내는 상황들 또한 과장된 제스처들로 점철되어 하나같이 비정상적이었습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캐릭터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습니다.
총격전 장면을 위해 미국 할리우드에서 19정의 모의총기와 7천발의 모의총알, 귀마개, 탄띠 등을 빌려와서 촬영했다는 것 정도가 ‘볼 거리’였다고 할까요. 영화를 보고나오는 관객들도 대부분 황당하다거나 어이없다는 반응을 나타냈지요.
‘진짜 사나이’는 서울 종로 3가의 피카디리 극장에서 4주 동안 상영됐는데, 3만여명의 관객만이 극장을 찾았습니다. 당시에는 개봉관에서의 첫 주말 관객 스코어를 기준으로 상영기간을 정했는데, ‘진짜 사나이’의 경우에는 저조한 관객 스코어에도 불구하고 4주간 상영됐습니다. 피카디리 극장이 ‘진짜 사나이’의 제작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빨노파'일당과 경찰 '라이방'의 추적을 따돌리고 바닷가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사나이'(권해효, 오른쪽)와 '그녀'(서미경, 왼쪽).
하지만 비평가들 가운데는 “의도된 유치함의 반란”이라고 호평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영화 속 ‘사나이’의 대사, “강철처럼 단단하고, 화산보다 더 뜨거운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최후의 인디언 추장 같은 나, 진짜 사나이”를 앞에 내세우며 “현실을 비껴간 키치즘의 일관성이 돋보인다”고도 했지요.
그래서였을까요. 10여 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에 영화계 일각에서는 ‘진짜 사나이’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도 일었습니다. 특히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평가는 다분히 호의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좀비영화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이 자신의 애니메이션영화 ‘사이비’(2013년)에 권해효를 목소리 연기자로 캐스팅할 때, “‘진짜 사나이’의 연기를 떠올렸다”는 캐스팅 비화가 전해지기도 했지요.
개봉 당시에는 남녀 주인공 권해효와 서미경의 연기에 대한 평가도 혹평이었거든요. 실제로 ‘진짜 사나이’의 출연 이후, 권해효는 거의 20년 동안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서미경은 ‘진짜 사나이’가 아예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가 되고 말았으니까요.
박헌수 감독의 입장에서 보면 ‘구미호’ 촬영 당시 고소영의 노출연기 거부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과는 달리 ‘진짜 사나이’에서 서미경은 과감한 노출연기를 그야말로 시원하게(?) 펼쳐냈으니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훗날이나마 배우들의 연기 재평가가 이루어져 내심 반가웠을 겁니다. (이창세 영화기획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서울 종로 피카디리 극장 앞 광장에서 펼쳐진 '진짜 사나이'의 제작발표회. 고사를 지내는 권해효(왼쪽)와 서미경(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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