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상 최초로 베트남 현지 로케이션으로 촬영된 영화가 ‘하얀전쟁’(1992년, 정지영 감독)입니다.
당연히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영화였습니다.
베트남전은 한국처럼 남북으로 나뉘어진 베트남의 통일과정에서 미국과 벌인 전쟁이지요. 무려 1960년부터 1975년까지 15년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원래는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정부군 사이의 내전 성격으로 시작되었으나 1964년 8월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한 뒤로는 북베트남과 미국의 전면전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미국이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에 파병을 요청하여 한국을 비롯한 태국,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 등의 참전도 이루어졌지요.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1964년 9월부터 의료진을 비롯해 맹호부대와 백마부대, 청룡부대 등 30만명이 넘는 전투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습니다. 이 전쟁을 치르면서 1만6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또 많은 참전군인들이 고엽제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정도니까요.
‘하얀전쟁’은 이같은 배경을 지닌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작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의 자전적 소설 ‘전쟁과 도시’를 영화화한 것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안정효 작가가 1983년 ‘실천문학’에 ‘전쟁과 도시’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후, 다시 ‘White Badge’라는 제목으로 직접 영역해 발간한 책이 미국에서만 100만 부 이상 팔려나갔습니다. 그만큼 이 소설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 등지에서도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베트남전에서의 상처가 미처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잡지에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소설을 연재하게 된 한기주(안성기)가 1980년대 민주화 시위의 격랑에 휩쓸리는 장면.
영화는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1980년대의 서울과 1967년 베트남 전장에서의 사건들을 교직해 그려냈습니다. 주인공 한기주(안성기)가 1년여 동안 백마부대원으로 베트남 전장에서 겪었던 경험들, 그리고 1980년대 중반 이 기간의 경험을 회상하며 참전 동료병사였던 변진수(이경영)를 만나서 벌어지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었지요.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한기주는 원인모를 무력감에 빠져 아내와도 별거할 정도로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월남전을 소재로 한 소설을 잡지에 연재하게 됩니다. 이때,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변진수로부터 연락을 받습니다.
한기주는 변진수를 찾아 병원으로 가지요. 그런데 변진수가 권총 한 자루를 내주면서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합니다. 베트남에서의 참혹했던 마지막 전투에서 살아남은 변진수는 여지껏 전쟁의 광기와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베트남에서 지낼 때 김하사(독고영재)의 여동생 영옥(심혜진)과 펜팔로 사귀며 무척 밝은 모습을 지니기도 했지만 변진수는 귀국 후 전쟁의 환영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거지요. 더구나 미군기지촌에서 양공주로 지내는 영옥을 만나서도 위로받지 못한 채, 오히려 정신적인 공황에 더욱 시달려왔던 거지요.
말하자면 변진수는 자신의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한기주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변진수의 절절한 고백을 들은 한기주는 마침내 변진수를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깁니다.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후에도 전쟁의 환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변진수(이경영)는 1980년대 민주화 시위의 함성조차 전쟁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괴로워한다.
영화는 무엇보다도 안정효 작가의 실제 참전 경험담이 스크린을 통해서도 생생하게 묘사된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리얼한 전투장면은 물론이고, 병사들의 진중 생활 에피소드 등까지도 매우 구체적으로 담아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베트남전은 소재일 뿐, 영화에서(또는 소설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전쟁 자체라기 보다는 전쟁을 겪으면서 처참하게 파괴된 참전병사들의 영혼과 그로 인한 폐해를 고발하는 데 있었습니다.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발생하는 정신신체 증상들, 이른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다루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하얀전쟁’의 영화화는 대단히 의미있는 작업이었습니다. 이러한 영화작업을 과감하게 시도한 제작사(대일필름)의 통 큰 베팅이 단연 화제로 떠올랐지요. 당시 영화 한 편의 평균 제작비가 5억여 원 정도였는데, ‘하얀전쟁’에는 무려 20억 원의 제작비를 쏟아부었으니까요.
1967년의 베트남전과 1980년대 민주화 시위의 현장을 교직해 펼쳐낸 영화 '하얀전쟁'은 안정효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해냈다.
베트남 현지에서의 촬영을 위해 쏟아부은 물량공세가 당시로서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이야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는 항공노선이 항공사별로 많이 편성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때문에 제작사에서는 촬영팀을 실어나르기 위해 전세기(아시아나)를 띄웠습니다.
베트남 현지에서의 촬영은 사이공(현재의 호치민)을 중심으로 다낭, 나트랑, 투이오하, 롱하이 등지에서 진행됐습니다. 다낭은 청룡부대, 나트랑은 백마부대가 주둔했던 곳이고, 투이오하는 베트남전 당시 격렬했던 전투지로 유명했던 곳이었습니다.
정지영 감독을 비롯한 유영길 촬영감독, 그리고 안성기를 위시한 이경영 독고영재 허준호 김세준 김보성 등 배우들은 롱하이 호텔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롱하이와 붕타우 지역은 현재 베트남의 유명한 해변 리조트 지역입니다만 당시에는 개발되기 전의 한적한 시골마을이었습니다. 그 곳에 남아있던 과거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자그마한 호텔이 ‘하얀전쟁’의 촬영팀 베이스캠프로 사용되었습니다.
한국에서 1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촬영팀이 찾아온 것이 알려지면서 롱하이 호텔 주변으로 베트남의 소상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임시 상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겁니다. 마치 6.25.전쟁 당시 미군 등 연합군이 주둔하던 곳에 한국인 행상들이 몰려들었던 상황과 흡사했습니다. 간이 식당이나 간이 주점도 생겨났고, 생필품을 파는 잡화점도 자릴 잡았습니다. 이를테면 ‘하얀전쟁’의 촬영팀 숙소 주변이 장터로 변한 셈이었습니다.
‘하얀전쟁’의 베트남 촬영도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촬영장소 또한 정지영 감독의 기대 만큼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또 베트남 현지 영화사의 도움으로 베트남전 당시의 고증에도 만전을 기할 수 있었지요.
베트남전 환영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괴로워하는 변진수 역을 빼어난 연기로 펼쳐낸 이경영은 대종상과 백상예술대상의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어찌보면 사건이라기 보다는 소동에 가까웠습니다. 촬영팀이 묵고 있던 호텔에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처녀귀신이 나타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중에서도 배우 김보성은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처녀귀신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면서 하얗게 공포에 질렸습니다. 일부 스태프들이 “이 호텔에 귀신이 나온다던데 진짜인 모양”이라며 김보성을 놀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호텔의 종업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예전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호텔의 주인딸이 가끔씩 나타난다”며 ‘증언’하는 바람에 촬영팀들 모두도 으스스한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귀신을 봤다며 겁을 먹었던 김보성은 아예 촬영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드러누웠습니다.
결국 김보성은 자신의 촬영 분량을 다 찍지 못한 채 귀국행 비행기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리고 촬영 도중 귀국한 김보성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국내의 매스컴에도 ‘가십기사’로 오르내렸습니다.
김보성의 ‘귀신소동’은 웃지 못할 해프닝도 낳았습니다. ‘하얀 아오자이 처녀귀신’을 사진에 담아보겠다는 몇몇 매스컴의 취재진이 베트남 현지 호텔로 날아가 며칠씩 잠복하는 소동을 펼친 거지요. 물론 취재진들의 의욕과는 달리 아무런 사진도 찍지 못하고 빈 손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주인공 한기주 역의 안성기. 그는 외국어대 베트남어과 출신답게 베트남 현지 촬영 당시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통역으로도 '열 일'했다.
‘하얀전쟁’의 베트남 촬영에서 가장 큰 활약을 펼친 주인공은 안성기였습니다.
그는 주인공 한기주 역으로 출연하는 것 외에 베트남어 통역으로도 ‘열 일’ 했습니다. 그는 외국어대 베트남어과 출신이었으니까요.
아역배우 출신이었지만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일반 학생들처럼 다녔던 안성기는 취업을 염두에 두고 베트남어과(1971년 입학)에 진학했는데, 1975년에 베트남전이 끝나는 바람에 전공을 써먹을 일이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런데 성인배우로 다시 활동하던 중 ‘하얀전쟁’의 출연 제의를 받았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실제로 베트남 촬영기간 동안 안성기는 공식 통역요원과 함께 촬영 스태프들의 소소한 베트남어 통역 요청을 열심히 들어주었습니다. “써먹을 일이 전혀 없을 줄 알았는데, 여기에 와서 이렇게 베트남어를 많이 해볼 줄 몰랐다”면서 말이지요.
1980년대 민주화 시위현장에 휩쓸리게 된 한기주 역의 안성기(바바리 코트 입은)와 변진수 역의 이경영(머리에 붕대 감은).
이렇게 공들여 제작한 ‘하얀전쟁’은 1992년 7월 여름방학 시즌에 개봉되어 서울에서만 19만명의 관객을 불러들여 흥행에도 제법 성공했습니다. 흥행뿐 아니라 비평가들로부터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지요.
그리고 ‘하얀전쟁’은 도쿄국제영화제에 출품되어 정지영 감독에게 최우수감독상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안성기는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이경영은 대종상과 백상예술대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수상의 주인공은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의 독고영재(남우조연상)였습니다. 김하사 역을 빼어나게 연기한 데 따른 평가였습니다만 그는 시상식장에서 감격어린 수상소감으로 영화팬들에게도 잔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TV를 보시다가 영록(전영록)이나 민수(최민수)가 나오면 슬그머니 채널을 돌리시곤 하셨습니다. 제 눈치를 보시면서요. 또 한편으로는 대를 이어 활발하게 연기활동하는 자식들에 대한 부러움도 있으셨던 게지요. 그런데 오늘만큼은 당당하게 채널 고정하고 보실 겁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자식 걱정하셨던 아버지, 이제 마음 놓으십시오. 저, 열심히 잘하겠습니다”
그의 부친은 19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에 악역 연기로 이름을 날렸던 故 독고성입니다. 전영록의 부친은 故 황해, 최민수의 부친은 故 최무룡이었구요. 마흔이 넘도록 무명배우로 살아와야 했던 독고영재의 고백이 절절하게 느껴진 순간이었습니다. 시상식장을 메운 청중들은 뜨거운 박수로 그를 격려했습니다.
그후 그는 자신의 말처럼 왕성한 연기활동을 펼치며 정상급 배우의 반열에 올라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하얀전쟁'의 국내 촬영을 지휘하고 있는 정지영 감독(안경 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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