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4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가 두달째 계속되던 어느날, 서민들이 모여 사는 5층 아파트 단지의 변압기가 터져나갑니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힘들어하던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파트 앞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 더위를 식히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이런 와중에 온통 피멍이 든 몰골의 여인네(하유미)가 아파트 광장으로 뛰쳐나옵니다. 뒤따라나온 남편은 아내의 머리채를 붙들고 계속 폭행을 가합니다. 남편은 고시에 떨어진 열등감에 의처증까지 더해져 아내의 외도를 추궁하며 아파트 주민들의 시선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아파트 여성주민들은 남편의 폭행에 대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집단으로 달려들어 그를 구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아파트의 남성주민들이 나서서 여성들을 뜯어말립니다. 급기야는 남성과 여성들이 뒤엉키는 폭력사태로 번지고, 마침내 경찰이 출동하면서 사태가 해결되는 듯 합니다.
여자들에게 얻어맞고 실신한 남편을 119 구급차랑에 태워보낸 경찰의 기동대장(정보석)은 아파트의 소동을 수습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씁니다. 하지만 구급차량에 실려가던 남편이 끝내 사망했다는 무전연락을 받은 기동대장은 폭행에 가담했던 여자들을 살인폭행 용의자로 간주하고 체포하려고 합니다.
사회풍자코미디 영화로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고르게 호평받았던 '개 같은 날의 오후'에서 열연 중인 호스티스 윤희 역의 정선경.
졸지에 살인범으로 몰린 여자들은 우왕좌왕하다가 무작정 아파트 옥상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옥상에 올라온 여자들은 40대 후반의 소설가 지망생 경숙(손숙), 영희 아빠와 정을 통하고 태연히 옥상에서 선탠을 하고 있다가 사건에 휩쓸리게 되는 독신녀 기순(이진선), 그런 기순을 옥상에서 맞닥뜨리고 기순의 머리채를 휘두르며 실갱이를 벌이는 영희 엄마(송옥숙), 부녀회장 은주엄마(김보연), 석이 엄마(황미선), 콩국수를 배달왔다가 얼떨결에 옥상에 합류하게 된 포항댁(임희숙), 야한 차림으로 외출하던 중 이들과 섞이게 된 호스티스 윤희(정선경), 그리고 윤희의 친구인 밤무대 가수 유미(김알음) 등 10명입니다.
자신들을 강제연행하기 위한 진압작전이 시작된다는 소식에 불안에 떨던 이들은 마침내 강경 대응하기로 뜻을 모읍니다.
이렇게 아파트 광장과 옥상을 오가면서 대치국면이 펼쳐지는 동안, 빈 아파트에 침입해 절도행각을 벌이던 2인조 도둑(이경영, 김민종)은 아파트 광장에 몰려든 경찰기동대 병력을 보고 화들짝 놀랍니다. 자신들을 잡기 위해 온 병력인 줄 착각한 겁니다. 어떻게든 도망쳐볼 궁리를 하지만 사면초가. 어쩔 수 없이 빈 집에 갇혀 틈만 엿보게 됩니다.
아파트 광장에서 투항을 권고하던 경찰기동대는 사다리차를 동원해서 옥상 진입을 시도하고, 옥상의 여자들은 격렬한 저항을 펼칩니다. 이 혼란의 상황에서 한 할머니가 옥상 아래로 투신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할머니의 투신은 급기야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긴급뉴스로 타전되면서 여성사회단체의 지지와 함께 전국민의 시선을 모으게 됩니다.
의처증으로 아내를 폭행하던 남편을 뜯어말리다가 급기야 그 남편을 집단 구타하게 된 아파트의 여성주민들(왼쪽부터 정선경 송옥숙 김보연). 이를 말리는 남성주민들과 몸싸움으로 번지면서 본격적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1995년 9월 추석시즌에 개봉된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이민용 감독)은 한 여름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 펼쳐진 서민 여성들의 인권투쟁보고서로 만들어져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당시만 해도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여성들이 억압받는 현실에 맞서 연대투쟁을 벌인다는 이야기를 영화로 옮겨낸다는 건 꽤 파격적으로 여겨질 때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들을 통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 외도를 밥 먹듯이 하는 남편, 권위주의적인 남편, 외모를 보고 여직원을 뽑는 사회, 그런가하면 술집에서 진상을 떠는 손님 등 남성 중심적인 사회시스템을 향한 ‘일갈’이 여간 매서운 게 아니었지요. 더 나아가 여러 명의 여자들이 힘을 합쳐 폭력 남편을 집단 구타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설정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때문에 몇몇 매체에서는 “보통의 여자들이 남성중심의 사회에 반기를 들었다”는 취지로 ‘개 같은 날의 오후’에 관한 영화리뷰를 싣기도 했습니다. 때마침 ‘매 맞는 아내’가 사회문제로 떠오르던 시점과 맞물려 상처받은 여성들의 억압이 터져나오는 내용은 영화의 파급력을 더욱 크게 확장시켰지요.
'개 같은 날의 오후'의 촬영현장. 이민용 감독(왼쪽)과 호스티스 윤희 역의 정선경.
‘개 같은 날의 오후’가 개봉되던 당시 정치사회적으로는 ‘3당 합당’으로 탄생한 김영삼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가 최저점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였습니다. 1995년 4월의 대구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와 6월의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으로 ‘국가 존재’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감이 폭발직전에 이른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개 같은 날의 오후’는 추석시즌이라는 개봉시기의 이점까지 더해서 서울에서만 28만명의 관객동원 기록을 세웠습니다. 90년대의 관객동원 기록과 관련해서는 이 컬럼에서도 여러차례 언급했습니다만, 서울 개봉관 관객 동원 기록 28만명을 요즘의 멀티플렉스 상영시스템으로 환산하면 500~600만명 정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촬영 당시 현장을 지휘하는 이민용 감독은 신인감독답지 않은 카리스마로 촬영현장을 이끌었다.
‘개 같은 날의 오후’는 이민용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었습니다.
이 감독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감독으로 데뷔한 ‘늦깎이 감독’이었습니다. 숭실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영화아카데미에서 연출수업을 쌓았던 이 감독은 故 박철수 감독의 조감독 생활을 하면서 감독데뷔의 기회를 모색했습니다만 좀처럼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원래 이 감독이 연출데뷔작으로 준비하던 영화는 1988년 10대 청소년들에게 성폭행을 당할 위기에 처한 가정주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자의 혀를 물어뜯은 사건(일명 ‘변월수 사건’)을 시나리오로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이미 ‘피고인’이라는 제목으로 김유진 감독에 의해 영화화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 감독은 준비하던 영화를 ‘쿨’하게 접었습니다. 김유진 감독이 선배감독이기도 했지만, 간발의 차로 자신보다 먼저 영화작업이 진행되었다는 점을 알게 됐기 때문이지요. 이 바람에 이 감독의 연출데뷔는 무려 5년여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감독의 ‘양보‘로 김유진 감독은 ’피고인‘을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1년)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영화를 만들었지요. 그리고 김유진 감독 역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를 통해 뒤늦게 연출역량을 평가받으면서 감독으로서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지요.
'개 같은 날의 오후'이 작품성과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후, 축하연에 모인 스태프와 배우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한 모습. 앞줄 왼쪽에서부터 하유미, 손숙, 송옥숙, 정선경, 임희숙, 이진선. 그 뒷편 오른쪽이 이민용 감독.
양보의 미덕이 가져다준 축복이었을까요. 5년을 기다렸던 이 감독에게도 ‘개 같은 날의 오후’는 복덩이와도 같았습니다.
사회풍자코미디라는 장르가 그동안 준비해오던 영화들과는 사뭇 달랐지만 이 감독은 오히려 이를 ‘페미니즘 영화’로 솜씨있게 치환시켰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을 통해 일상의 폭력에 반기를 든 능동적인 여성상을 그려내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수동적인 경찰기동대의 모습이나 아파트 남성들의 획일적인 모습을 옥상 위의 여성들과 대비시킨 연출의 ‘한 수’가 주효했던 탓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면면에서도 이 감독은 ‘캐스팅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송옥숙, 정선경, 김보연, 손숙, 하유미, 이경영, 김민종, 정보석 등의 배우들을 한 영화에 캐스팅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다 단역이나 카메오로 출연한 이들 중에는 김승우, 이범수 등의 배우와 가수 임희숙, 장진, 김해곤 감독 등도 있습니다. 장진 감독은 당시 이 영화의 시나리오 각색자로 참여하면서 배우로도 잠깐 출연한 것이고, 카메오로 등장한 김승우와 이범수는 ‘개 같은 날의 오후’의 제작사(순필름)의 이순열 대표와의 ‘끈끈한 의리‘로 출연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런 ’낭만‘이 영화계에는 꽤 남아 있었지요.
이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소울 가수’ 임희숙이었습니다. 임희숙은 이민용 감독의 누나입니다. 이부(異父)남매 사이입니다만 임희숙은 일찌감치 동생의 영화적 재능을 믿고 아낌없이 지원해왔지요. 그리고 마침내 ‘개 같은 날의 오후’로 동생이 감독으로 데뷔하게 되자 팔 걷어부치고 마치 제작부 스태프처럼 온갖 일을 거들었습니다. 여기에다 콩국수 배달하는 포항댁으로 나와 열연을 펼쳤고, 故 이영훈이 맡았던 영화음악에서 주제가 부분을 직접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누나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었는지 ‘개 같은 날의 오후’는 작품성에 대한 평가도 좋았고, 흥행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와이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도 누렸고, 이 감독 역시 대종상,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춘사예술대상 등 국내의 모든 영화상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배우들 중에서도 송옥숙이 청룡영화상에서 생애 처음으로 여우주연상 수상의 기쁨을 안았고, 김보연도 춘산예술대상에서 우수연기상을 받았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이전글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