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한국영화계에 불어닥친 ‘기획 영화’의 바람은 기존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림과 동시에 제작현장의 인력 시스템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는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이라는 단체 소속의 20여 개 제작사만이 영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법제화되어 있었습니다. 때문에 한국영화는 이러한 제작사들의 이름을 붙여야만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들 회사 외의 영화 제작자가 영화를 제작하려면 얼마간의 비용을 지불하고 이들 회사의 이름을 빌려야 했습니다. ‘대명 제작’이라는 시스템이었지요.
하지만 그런 영화들도 세상에 나올 때는, 이름을 빌려준 회사의 대표이사가 크레딧에 ‘제작’으로 명기되어야 했습니다. 실제 제작자는 대개 ‘기획’으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당시 한국영화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첫째는 지방흥행업자들로부터 일정 규모의 선불금을 받아 제작하는 방식, 둘째는 외국영화 수입쿼터를 따내기 위해서 연간 4편을 ‘속전속결’로 제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도 지방흥행업자들의 선불금으로 제작되는 영화는 흥행성공이라는 목표를 갖고 있는 ‘기대작’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국영화 수입쿼터 때문에 ‘연간 4편 제작’ 지수를 맞추기 위해 만들어지는 영화의 수준은 시쳇말로 형편없었습니다.
만일 70년대~80년대에 나온 한국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을 때, “차마 눈을 뜨고 봐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십중팔구 외화수입쿼터용일 겁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만들어낸 영화의 제작인력 또한 소모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지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다시 만난 옛 연인으로 열연한 박신양과 이미연.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영화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물론 오랜 세월동안 한국영화를 제작해온 제작사들과 인력이 여전히 건재했습니다만 기존의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제작 인력이 영화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거의 전무했던 외국 유학파 감독과 프로듀서들도 이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삼성과 대우 등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대기업들이 소프트웨어의 필요성 때문에 영화사업에 뛰어든 것도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영화의 제작시스템도 ‘감독과 출연배우 이름이 적힌 제작기획서 한 장’으로 지방흥행업자들로부터 선불금을 받아오던 관행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관객의 기호에 맞춘 이야기를 찾아내고 시나리오를 만들어내는 ‘철저한 계산’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 영화제작에 들어갔습니다. 이름하여 ‘기획영화’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대기업은 이들 기획영화에 기꺼이 제작비 투자를 결정했습니다. 오늘날의 영화산업 구조, 즉 투자(배급)와 제작의 분리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이 시대에 뚝심을 갖고 한국영화를 기획 제작하던 이들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년, 강우석 감독)와 ‘결혼이야기’(1992년, 김의석 감독)의 신씨네(신철 대표),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년, 장선우 감독)의 기획시대(유인택 대표), 또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년,정지영 감독)의 영화세상(안동규대표) 등이었습니다. 이들을 두고 ‘프로듀서 1세대’라고들 일컬었지요.
그리고 이들 회사 작품의 제작현장에서 실력을 쌓아온 차승재 프로듀서가 1995년 우노필름을 설립했습니다. 프로듀서 2세대의 시작을 알린 겁니다.
기획영화의 제작현장에서 온몸으로 체득한 그의 제작노하우는 설립작품 ‘돈을 갖고 튀어라’(1995년, 김상진 감독)의 흥행성공으로 단번에 입증됐지요. 뿐만 아닙니다. 두 번째로 기획제작한 영화 ‘비트’(1997년, 김성수 감독)는 아예 대형사고를 쳤습니다. 서울에서만 37만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니까, 지금 기준으로 보면 5백~ 6백만 명 정도 되는 기록입니다.
'모텔 선인장'의 출연 당시 이미연은 '넘버3'(1997년,송능한 감독)의 빅히트로 충무로 캐스팅 0순위로 떠올랐을 때였고, 박신양 역시 '유리' (1996년, 양윤호 감독)로 혜성같이 등장한 기대주였다.
이 여세를 몰아 기획한 영화가 오늘 이 컬럼에서 소개하는 ‘모텔 선인장’(1997년, 박기용 감독)입니다.
모텔이라는, 그것도 ‘407호’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서로 다른 만남과 헤어짐에 관한 영화였는데, 네 쌍의 남녀가 펼쳐내는 사랑과 성, 소통의 단절 등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겨졌습니다.
다분히 실험적인 시도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에 대해 관객들이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모텔 선인장’보다 1년여 앞서 나왔던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년, 홍상수 감독)도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새로운 한국영화의 등장을 알렸지만 당시 관객들의 반응은 평단과는 다소 차이를 보였습니다. 훗날 ‘홍상수표 영화‘라는 브랜드로 일컬어지게 되기까지 좀 시간이 필요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모텔 선인장’을 기획제작한 차승재 대표는 내심 복안이 있었습니다. 바로 캐스팅 라인업이었지요. 평단의 극찬을 받았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캐스팅(이응경, 김의성, 박진성, 조은숙)과는 달리 ‘모텔 선인장’의 캐스팅은 그야말로 ‘별들의 전쟁’과도 같았습니다.
정우성, 박신양, 이미연, 진희경. 각기 다른 영화에 주인공으로 나설 수 있는 네 배우가 하나의 영화에서 뭉친 겁니다.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감독의 가세로 '모텔 선인장'은 감각적인 비주얼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당시 정우성은 전작 ‘비트’의 빅히트와 함께 명실상부한 차세대 청춘스타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박신양 역시 ‘유리’(1996년, 양윤호 감독)에서 발군의 연기로 혜성같이 등장한 기대주였으며, 이미연은 하이틴스타 출신이면서도 ‘넘버3’(1997년, 송능한 감독)에서의 명연기로 충무로 캐스팅 0순위로 떠올랐던 때였습니다.
모델 출신의 진희경도 스릴러영화 ‘손톱’(1994년, 김성홍 감독)과 ‘은행나무 침대’(1996년, 강제규 감독)를 통해 정상급 배우로 평가받고 있었지요.
당연히 매스컴의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여기에다 촬영감독으로 크리스토퍼 도일까지 가세했습니다. 호주출신의 크리스토퍼 도일은 당시 홍콩의 왕가위 감독과 함께 ‘아비정전’ ‘중경삼림’ ‘타락천사’ ‘해피 투게더’ ‘화양연화’ 등 이름만 들어도 영화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영화들을 찍어온 촬영감독이었습니다. 왕가위 감독 특유의 감각적인 미장센이 바로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요.
촬영감독 호주출신 크리스토퍼 도일과 박기용 감독.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서 봤음직한 색감과 비주얼이 '모텔 선인장'에서도 제법 등장했다.
차승재 프로듀서의 기획력이 또한번 빛을 발했습니다. 주연배우 정우성은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감독 내정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출연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원래 정우성은 전작 ‘비트’를 촬영하던 도중 허리 디스크가 터지는 바람에 모든 일정을 뒤로 하고 일찌감치 수술날짜를 잡아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감독과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수술일정을 뒤로 미루고 ‘모텔 선인장’에 출연하기로 마음 먹은 겁니다. 그것도 노개런티로 말입니다.
허리 디스크가 터져 수술날짜를 잡아놓았던 정우성은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감독의 내정 소식에 수술일정을 뒤로 미루고 전격적으로 출연을 결정했다.
실제로 ‘모텔 선인장’에서는 왕가위 감독 영화에서 봤음직한 색감이나 흔들리는 앵글 등이 심심치 않게 나타났습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나 유리창 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이용해서 인물의 표정이나 움직임을 카메라에 담아낸 장면도 왕가위 감독을 흉내낸 듯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떠나려는 남자(정우성)와 잡으려는 여자(진희경), 과거를 추억하며 낯선 사람과 원 나잇 스탠드로 어울리는 남녀(박신양, 진희경),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옛 연인(박신양, 이미연), 또 성적 호기심에 이끌린 젊은 남녀(한응수, 김승현) 등의 이야기들 역시 선명한 내러티브 보다는 비주얼에 훨씬 더 많은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습니다.
완성된 영화 ‘모텔 선인장’은 화제성 만큼이나 평단으로부터는 대체적으로 지지를 얻었습니다. 다만 정상급 배우들의 화려한 연기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적지 않은 아쉬움을 남겼지요.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감각적인 영상 만들기에 주력했던 탓이었습니다.
'모텔 선인장'의 중심 인물인 이미연(사진 위)과 박신양(사진 아래).
때문에 서울관객 기준으로 5만여명 정도가 관람하는 데 그쳤습니다. 다만 그해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서 최우수 아시아신인작가상(박기용 감독)을 수상하며 체면을 세웠고, 네덜란드의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는 국제비평가협회상(특별 언급)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당시 ‘모텔 선인장’의 조감독이 데뷔하기 전의 봉준호 감독이었다는 점, 봉준호 감독은 ‘모텔 선인장’의 시나리오도 박기용 감독과 공동으로 작업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차승재 프로듀서의 기획으로 ‘플란다스의 개’(2000년)로 감독데뷔했으며, ‘살인의 추억’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이창세 영화기획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모텔 선인장'의 박기용 감독(사진 맨 위). 박신양, 이미연과 촬영장면을 숙의하고 있는 박기용 감독(사진 가운데). 영화의 대부분을 모텔에서 촬영하는 장면(사진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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