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에서 크고 작은 뉴스들이야 늘 만나게 되는 일상과도 같은 것이지만 1994년엔 의미있는 몇몇 뉴스들이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그해 7월, 한반도 분단 고착화의 한 축이었던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는 뉴스는 한반도 뿐 아니라 전세계의 비상한 이목을 집중시켰지요. 김일성 주석의 사망 소식은 마치 당장이라도 남북한의 통일이 이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또 한편으로는 북한측의 도발에 대한 경계심 등이 뒤섞이면서 한동안 한국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별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오히려 3개월여 후에 벌어진 서울 성수동의 성수대교 붕괴사건이 국민들의 시선을 잡아끌었습니다. 다리 한 가운데 상판이 떨어져 한강으로 추락한 사건이었습니다. 출근길의 시민 50여명이 한강 아래로 다리 상판과 함께 추락하여 무려 32명이나 사망했습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지요.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터널과도 같았던 군사정권의 암흑정치에서 벗어나 스스로 ‘문민정부’라 일컬으려 차별화를 꾀했던 김영삼 정부로서는 그야말로 ‘뼈아픈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도그럴것이 정부에서 내건 기치가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뿌리뽑겠다는 것이었는데, ‘성수대교 붕괴사건’은 그야말로 건설사의 부실공사와 감리담당 공무원의 부실감사로 인해 벌어진 ‘인재’와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기는 성수대교가 지어진 것은 1979년이었으니까 당시 김영삼 정부 시절에 벌어진 부정부패라고는 볼 수 없었지요. 다만 이 사건으로 인해 부정부패 척결 정책의 드라이브가 보다 더 강력하게 추진되는 발판이 되기는 했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이후 4년만에 부부로 나와 열연했던 '마누라 죽이기'의 박중훈과 故최진실.
전형적인 코미디영화 ‘마누라 죽이기’(1994년, 강우석 감독)은 바로 이처럼 1994년이 저물어가던 무렵 사회 전반에 퍼져있던 씁쓸하면서도 우울한 분위기를 잠시나마 잊게 하는 활력소의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대개 연말연시의 풍경이란 게 길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밝은 표정이 넘쳐나는 등의 분위기가 일반적인 모습입니다만 당시엔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코미디 영화의 기획과 연출에 남다른 재능을 지닌 강우석 감독은 이미 전작인 ‘투캅스’(1992년)나 ‘미스터 맘마’(1992년) 등의 영화를 통해서 그 실력을 입증해보였지만 ‘마누라 죽이기’는 무엇보다도 매우 적절한 타이밍에 만들어져 관객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컨셉부터 의미심장했지요.
코미디영화라고는 하지만 ‘마누라를 죽이려고 용쓰는 남편’의 이야기라는 게 관념적으로 선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서로 좋아서, 죽고 못 살 것 같아 결혼한 부부들이라도 살다보면 이런저런 갈등을 빚는 게 ‘인생지사‘이며, 그래서 ’욱‘ 하는 심정으로 “확 갈라서!”라고 소리칠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배우자가 죽기를 바라는 것은 좀 지나친 설정이라고 여겨졌으니까요.
'마누라 죽이기'의 남녀 주인공인 봉수(박중훈, 사진 위)와 소영(최진실, 사진 아래).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마누라 죽이기’의 촬영 직전, 마케팅 차원에서 “마누라를 죽이고 싶을 만큼 열 받았을 때, 어떤 방법을 쓰면 좋을까”라는 아이디어를 공모했는데, 제법 많은 의견이 접수됐다는 점입니다. 이 아이디어들 중에는 영화개봉 당시 포스터에 실렸을 만큼 다양하면서도 기발한 내용도 꽤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값의 다이아몬드를 선물해 쇼크사를 유도한다”거나 “숨쉴 틈을 안주고 키스한다(자기가 먼저 질식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할 것)”, 또는 “문을 꼭 닫고 1천송이의 백합꽃을 여러 꽃병에 꽂아둔다”, “간지럼을 많이 태워 웃다가 죽게 만든다” 등등.
일반 대중의 아이디어 중 일부는 영화에서 차용되기도 했습니다.
영화 역시 그동안 보여줬던 강우석 감독표 코미디 코드들로 넘쳐났습니다. 강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코믹 캐릭터’의 설정, 그리고 박중훈과 故최진실의 호연도 한 몫 했습니다.
박중훈의 코미디 연기는 전작들인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년)이나 ‘투캅스’를 통해서 충분히 검증되어 있었고, 최진실 역시 박중훈과는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 또 강우석 감독과는 ‘미스터 맘마’에서 호흡을 맞췄던 ‘코믹 케미‘를 유감없이 펼쳐내면서 순탄하게 촬영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내 소영(최진실, 오른쪽)에게 질린 봉수(박중훈, 왼쪽)는 놀이공원에서 소영의 심장마비를 유도하려고 했으나 정작 자신이 심장마비 직전까지 가는 고통을 겪는다.
영화 속에서 부부사이인 박중훈과 최진실은 영화사 사장 ‘봉수’와 기획자 ‘소영’으로 등장합니다.
이 캐릭터의 설정은 당시 국내 영화계에서 부부, 혹은 연인으로 영화일에 종사하고 있던 몇몇 커플을 떠올리게 하면서 화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봉수는 소영의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지칠대로 지쳐있습니다.
일과 가정 등 매사에 자신의 의견만을 관철시키는 소영에게 질린 봉수는 자신이 제작하는 영화에 출연하는 여배우 혜리(엄정화)와의 만남에 위로를 얻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혜리가 느닷없이 봉수에게 ‘소영과의 이혼’을 요구합니다.
봉수도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소영이 쉽게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예 소영을 없애버릴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해 가면서 사고사로 위장해보려고 애를 쓰지만 번번이 실패하자 마침내 전문킬러(최종원)까지 고용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킬러마저도 전문킬러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엉뚱한 해프닝만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전문킬러(최종원, 왼쪽)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소영(최진실, 오른쪽)을 죽이려고 애쓰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오히려 자신이 봉변을 당한다.
대략의 내용에서 보듯 봉수와 소영, 그리고 끼어든 킬러 등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는 설정 자체에 웃음이 장착돼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 인물들이 등장해서 던지는 대사 하나, 동작 하나하나에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어쩌면 ‘마누라 죽이기’라는 영화 제목 때문에 살짝 불편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었던 관객들조차 그저 마음 편하게 웃고 극장문을 나섰습니다.
박중훈과 최진실의 코미디는 예상대로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켰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이후 4년만에 박중훈과 최진실을 다시 커플로 조합해낸 강우석 감독의 캐스팅 능력 덕분이었다고도 할 수 있지요.
'마누라 죽이기'에서 봉수(박중훈)가 제작하는 영화의 감독(조형기, 왼쪽)과 여배우 혜리(엄정화, 오른쪽).
강 감독은 박중훈의 결혼식 후, 집들이에 초대받아 간 자리에서 ‘마누라 죽이기’의 캐스팅 조합을 만들어냈습니다.
당시 박중훈의 결혼 집들이에 초대받아 온 지인들 중에 최진실도 있었는데, ‘미스터 맘마’ 이후 주로 TV드라마에 출연하느라 바쁘게 지내던 그녀에게 “나랑 다시 영화도 같이 하자”고 제의했던 거지요.
그런데 최진실이 농담처럼 “감독님, 이제는 흥행되는 영화말고 상받는 영화도 해보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던 겁니다.
그러자 강 감독이 “내 영화에 출연하면 나는 상 못받아도 배우들은 상 받게 만든다”면서 “박중훈도 ‘투캅스’로 대종상 남우주연상 받았잖아”라고 응수했지요.
당연히 최진실이 눈을 반짝이면서 “무슨 영화인데요?”라고 물었고, 강 감독은 “거의 원맨쇼야. ‘마누라 죽이기’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시 최진실은 반신반의했습니다.
왜냐하면 영화계에서는 코미디영화로 상받기가 쉽지 않다는 통념같은 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강 감독에 대한 의리, 또 그렇게까지 설득모드로 나서는 강 감독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녀는 ‘마누라 죽이기’에 출연했고, 영화 역시 서울 관객 42만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매사에 자신의 의견만을 관철시키는 아내 소영(최진실)에게 지칠대로 지쳐가는 봉수(박중훈)의 침실장면을 촬영하는 모습.
그리고 강 감독이 최진실에게 장담했던 약속.
그해 대종상시상식에서 최진실은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진 겁니다.
다만 그녀는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반신반의. 시상식에 참석하는 대신 미국으로 CF촬영을 떠나는 바람에 여우주연상 트로피는 그녀의 어머니가 대리수상했습니다.
‘마누라 죽이기’에서는 또 한 명의 예기치 않았던 복병 연기자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킬러 역의 최종원.
그는 전문킬러와는 거리가 멀어도 상당히 먼, 어수룩한 킬러의 캐릭터를 감칠맛 나게 구현해냈습니다.
소영(최진실)을 죽이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쓰지만 결국은 오히려 자신이 봉변당하고 마는 킬러의 모습에 관객들은 박장대소했습니다. 대사는 별로 없지만 그 표정만으로도 관객들은 단박에 ‘이해하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최종원은 ‘마누라 죽이기’를 통해 그의 연기 인생에서 ‘전성시대‘라는 걸 맞게 되었지요. 그전까지는 연극배우 출신으로 많은 연기경력을 쌓아왔지만 영화나 TV드라마에서는 그저 조-단역을 맡아왔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마누라 죽이기‘에서의 압도적 연기로 영화관계자들의 관심을 모으면서 1995년 한 해에만 ’영원한 제국‘(박종원 감독) 등 ‘7~8편의 영화에서 주조연을 맡았으니까요.
훗날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최종원도 ’마누라 죽이기‘가 자신의 연기인생을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삶‘으로 바꿔놓은 작품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마누라 죽이기'의 촬영현장을 지휘하는 강우석 감독.사진 맨위, 빨간 옷차림. 그리고 사진 아래쪽의 검은 티셔츠차림.
'마누라 죽이기'의 촬영에 앞선 고사장면. 최진실(사진 가운데)이 술잔 따르는 모습을 뒤쪽에서 바라보는 박중훈(오른쪽).
이전글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