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세의 무비스토리

[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죽이는 이야기`

기사입력 [2019-04-22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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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금융위기로 온 나라가 극도의 혼란에 빠졌던 1997년 말, 크리스마스와 세밑을 앞둔 거리에서는 캐롤송조차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의 분위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예년 같으면 경쾌한 징글벨이 울려퍼지고 길거리를 오가는 시민들의 손에는 선물보따리가 들려있었을 법한 연말연시의 풍경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얼마전 공개된 영화 국가부도의 날’(2018, 최국희 감독)를 통해 당시의 긴박했던 위기 상황을 다시한번 떠올렸던 것처럼 199711월부터 뒤덮기 시작한 암울한 그림자는 우리 사회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들이 잇단 부도사태로 줄도산하면서 실직자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습니다. 환율은 치솟고, 주식시장은 바닥을 치는 등 국내의 경제상황은 끝모를 나락으로 떨어져갔습니다.

 

이 무렵에 개봉된 영화가 죽이는 이야기’(1998, 여균동 감독)였습니다.

서울 도심 을지로에 위치한 명보극장에 신년특선프로라는 이름으로 죽이는 이야기의 영화간판이 걸렸습니다. 간판 속에서는 야릇한 표정의 여주인공 황신혜가 심심한데, 뭐 죽이는 일 없을까?”라면서 거리를 오가는 시민들의 시선을 잡아 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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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변신을 꿈꾸는 삼류 에로배우 말희(황신혜)는 구이도 감독(문성근)에게 육탄공세를 퍼붓는다.

  

영화를 알리는 포스터와 전단에는 비디오카메라로 투숙객들의 정사장면을 몰래 찍는 여관 종업업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려는 어느 감독의 서글픈 인생고백이라면서 에로틱 코미디영화임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영화의 내용이나 카피는 사뭇 생뚱맞은 느낌을 안겨주었습니다. 심심한데?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데, ‘심심하다는 표현을 쓰게 됐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여주인공 황신혜의 야릇한 표정도 섹시한 포즈도 하루하루 살기가 급박한 당시의 시민들에게는 대안지화(對岸之火)’나 다름없었지요. 결국 죽이는 이야기신년특선프로로 개봉됐지만 관객의 관심을 제대로 끌지 못한 채 종영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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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블랙 코미디로 펼쳐지는 '죽이는 이야기'에서는 배우들의 열연이 인상적인데, 특히 몸매만 좋고 머리 나쁜 삼류 에로배우 말희역의 황신혜가 역대급 연기를 펼쳤다.

  

불과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개봉극장들이 몰려있는 서울 종로 3가의 극장가에는 접속’(1997, 장윤현 감독)노는 계집- ’(1997, 임권택 감독), 그리고 편지’(1997, 이정국 감독) 등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관객들로 넘쳐났습니다만 죽이는 이야기를 상영하는 19981월의 명보극장 앞 풍경은 썰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를 두고 죽이는 이야기에 제작비를 선() 투자한 지방흥행업자들은 개봉 운이 없었다고 탄식하며 흥행부진의 이유를 댔습니다. 하기는 당대 정상급의 배우들인 문성근 이경영 황신혜가 주인공으로 포진했고, 여균동 감독은 세상 밖으로’(1994)를 통해 연출력(대종상 신인감독상)을 검증받은 감독이었으니까 그럴만도 했습니다.

 

여기에다 제작자는 미스터 맘마’(1993, 강우석 감독)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김형준 대표(한맥영화사)로 흥행감각에 관한 한 알아주는 인재였던 터라 죽이는 이야기의 흥행부진은 영화계 안팎에서도 의외의 결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흥행 요소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한 이유를 IMF사태의 후폭풍인 탓으로 여겼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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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는 이야기'의 주인공. 위로 부터 구이도 감독 역의 문성근, 액션배우 하비 역의 이경영, 삼류 에로배우 말희 역의 황신혜.

  

하지만 죽이는 이야기의 종영 2주쯤 후에 개봉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 허진호 감독)에는 꽤 많은 관객들이 극장을 찾았습니다. 더군다나 ‘8월의 크리스마스는 시한부 삶을 사는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를 절제된 연출로 담담하게 그려냈음에도 관객들의 호응이 뜨거웠습니다.

 

말하자면 죽이는 이야기IMF 사태의 직격탄을 맞아 흥행부진을 겪었다기 보다는 당시 대중의 정서와 동떨어진 내용의 영화였다는 점 때문에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국가부도의 상태가 언제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에 초미의 관심을 두고 있던 상황에서 여관의 몰래 카메라를 소재로 한 에로틱 코미디영화에 시선을 둘 여유가 없었던 거지요.

 

이에 반해 ‘8월의 크리스마스는 답답하고 속상해서 울고만 싶던 대중의 마음을 감동적인 사랑이야기로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었던 겁니다.

 

어찌보면 죽이는 이야기에 선 투자했던 지방흥행업자들의 분석이 정확했던 셈입니다. 시대적 상황이나 분위기가 영화의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죽이는 이야기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아쉬움을 많이 남긴 영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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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로서의 변신을 꿈꾼다면서 몸매만 앞세우는 삼류 에로배우 말희 역의 황신혜는 그녀의 연기인생 중 가장 리얼한 연기를 선보였다. 

 

원래 여균동 감독은 영화의 내용을 이탈리아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82분의 1’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영화일에 지친 감독이 작품 구상겸 휴양차 온천에 들렀다가 현재와 과거의 환영에 사로잡혀 겪게 되는 이야기가 ‘82분의 1’의 내용인데, ‘죽이는 이야기역시 주인공 구이도(문성근)가 새로운 영화를 구상하는 감독으로 설정되어 있었지요.

 

심지어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열연한 ‘82분의 1’의 주인공 귀도와 비슷한 어감의 구이도라는 이름도 다분히 의도적인 네이밍이었습니다. 영화 속의 영화라는 액자식 구성도 비슷했지요.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영화를 만들겠다면서 몰래 카메라로 여관방을 훔쳐보다 여자손님을 사랑하게 된 종업원의 사랑이야기를 기획한 구이도. 하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 같은 여배우를 꿈꾸는 삼류 에로배우 말희(황신혜)와 느와르 액션영화를 주장하는 배우 하비(이경영)의 욕심이 서로 부딪치면서 영화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비단 이들 외에도 여관방과 섹스 컨셉의 영화라는 말에 무조건 돈을 대겠다고 나선 제작자(최용민), 정사신 대역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배우 지망생 춘자(전혜진),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고 들여다보는 여관 종업원(권병준) 등 하나같이 현실을 풍자하는 캐릭터로 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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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는 이야기'의 주인공들, 아래 사진 왼쪽이 여균동 감독.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계의 실상을 끄집어내 조롱하겠다고 작정한 듯 여 감독은 매 시퀀스를 블랙 코미디 연출로 일관했습니다. 마치 그동안 자신이 영화를 만들어오면서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힘들었는지를 자조적으로 비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죽이는 이야기에서는 무엇보다도 배우들이 여 감독의 연출의도를 충실하게 따라준 듯한 맞춤 연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술을 하려다가 음란영화를 만들고마는 무능한 영화감독 구이도 역할을 천연덕스럽게 해낸 문성근과 느와르르노아르라고 부르는 얼치기 액션배우역의 이경영은 특유의 연기케미를 발산했지요.

 

이중에서도 특히 자기 몸매만 믿고 설쳐대는 에로 배우 말희 역의 황신혜는 그녀의 연기인생 중 역대급 연기력을 선보였다는 평가를 들었을 만큼 캐릭터와 완전히 동화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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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영화에서 여주인공 말희 역을 연기하는 황신혜에게 연기 디렉팅 중인 여균동 감독(사진 위). 비오는 거리에서의 촬영현장(사진 아래).

  

비록 단역이지만 개그맨 김진수의 활약도 돋보였지요. 영화 속에서 구이도(문성근) 감독의 제작부원으로 등장한 김진수는 촬영현장에서 소란을 피우는 동네사람들을 통제하려다가 궁지에 몰리게 되는 해프닝을 실감나게 연기했습니다.

 

죽이는 이야기에는 제작자 김형준 대표와의 인연으로 이색적인 카메오 연기자가 여럿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젊은이들로부터 인기를 끌었던 펑크그룹 삐삐롱스타킹의 싱어 고구마(권병준)가 여관 종업원으로 출연했고, 최민수가 여관종업원을 협박하는 청계천 양아치로, 그룹 신촌블루스의 기타리스트 김병호가 동네 라이브카페 기타리스트로 나와 호연들을 펼쳤습니다.

 

춘자 역의 전혜진은 당시 상명대 영화과 3학년생으로 제작사에서 실시한 신인 여배우 공모를 통해 선발됐습니다. ‘죽이는 이야기가 그녀의 데뷔작이 된 겁니다. (이창세 영화기획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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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에 앞서 콘티를 점검하는 문성근과 황신혜(사진 위), 두 배우의 콘티 점검을 바라보며 촬영을 준비 중인 여균동 감독(사진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