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로부터 1990년대의 한국영화계는 마치 국민배우 ‘안성기의, 안성기에 의한, 안성기를 위한’ 시대와도 같았습니다. 1952년 1월1일생인 그의 나이 마흔 전후쯤인 그 시절에 국내에서 제작되는 영화들 중 그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는 별로 없었으니까요.
특히 1980년대 안성기의 위상은 절대적이고, 독보적이었습니다. 군사독재정권의 검열과 3S(Sex, Sports, Screen) 정책으로 획일적인 영화들이 양산되던 와중에 이장호 배창호 감독 등을 중심으로 리얼리즘 영화들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안성기는 바로 이들 영화에서 주연을 도맡다시피 했던 겁니다.
검열과 3S정책으로 국민을 우민화하려는 시도가 노골화되면서 한국영화계에는 70년대 후반 무렵 나타난 ‘영자의 전성시대’(1975년)와 ‘겨울여자’(1978년, 김호선 감독) 등을 기점으로 ‘호스티스영화’들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애마부인’(1982년, 정인엽 감독) ‘산딸기’(1985년, 김수형 감독) ‘변강쇠’(1986년, 엄종선 감독) ‘매춘’(1988년, 유진선 감독) 등이 그것이었지요.
그런데 이들 영화와는 다른 결을 지닌, 사회의 어두운 현실과 억압 등을 고발하는 ‘바람불어 좋은 날’(1980년, 이장호 감독)을 비롯한 ‘어둠의 자식들’(1981년, 이장호 감독)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0년, 이원세 감독) ’꼬방동네 사람들’(1982년, 배창호 감독) 등의 영화들이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영화의 주연배우였던 안성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지요.
다분히 과장된 연기 앙상블과 미장센, 그리고 뮤지컬 요소까지 가미한 슬랩스틱 뮤지컬 코미디영화로 탄생한 '남자는 괴로워'의 한 장면.
안성기는 비단 사회고발 형식의 리얼리즘 영화 외에도 ‘한국영화의 新 르네상스’를 예감케 하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80년대의 화제작 혹은 문제작으로 평가되는 영화들의 크레딧에는 어김없이 안성기의 이름이 올라 있었습니다.
‘만다라’(1981년, 임권택 감독)를 비롯해 ‘적도의 꽃’(1982년, 배창호 감독) ‘고래사냥’(1984년, 배창호 감독)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년, 배창호 감독) ‘깊고 푸른 밤’(1985년, 배창호 감독) ‘어우동’(1986년, 이장호 감독)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년, 이장호 감독) ‘내시’(1986년, 이두용 감독) ‘성공시대’(1988년, 장선우 감독) ‘칠수와 만수’(1989년, 박광수 감독) ‘남부군’(1989년, 정지영 감독) 등이 당시의 영화들입니다.
안성기의 필모그라피는 2019년 현재 시점에서 돌아보아도 그야말로 화려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국영화사를 통틀어도 안성기 만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풍성한 커리어를 지닌 배우는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그의 연기상 수상 기록을 보면 한국의 3대 영화상으로 불리는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청룡상 등에서 모두 수상한 것은 물론 국내 영화상에서 수상가능한 주연상을 무려 25번이나 수상한, ‘독보적 배우’임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독보적 원톱의 시대였던 80년대의 필모그라피 중에는 화제작과 문제작들 외에 대중의 관심을 그리 끌지 못했던 영화들도 심심치 않게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출연제의를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그의 인성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그 시절, 안성기는 기획 제작되는 거의 대부분의 영화에 출연 제의를 받았습니다. 모든 영화에 출연할 수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어려운 형편을 토로하는 제작사나 혹은 과거에 함께 작업했던 스태프가 인정에 호소하는 경우, 그는 두말 않고 출연을 승낙했습니다. 그의 낙점을 기다리던 제작진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요.
'남자는 괴로워'에는 출연 배우들의 실명이 그대로 영화 속의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부하직원들을 들볶는 윤주상 부장(왼쪽)과 소심한 성격의 안성기 과장(오른쪽).
‘남자는 괴로워’(1995년, 이명세 감독)도 어쩌면 그런 영화 중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명세 감독과의 끈끈한 인연에서 비롯된 영화작업이었으니까요.
이명세 감독은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로 불리던 배창호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었습니다. 80년대 침체된 한국영화의 대중성을 확장시킨 배창호 감독의 영화들, ‘고래사냥’ 1,2편을 비롯해 ‘황진이’(1986년) ‘기쁜 우리 젊은 날’ 등의 조감독을 맡아 탁월한 연출재능으로 배 감독을 보필했습니다.
배 감독도 늘 조감독(이명세)의 의견을 진지하게 경청했습니다. 자신의 조감독이었지만 뛰어난 연출감각과 재능을 인정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인 ‘개그맨’(1988년)에는 출연(배우)을 자청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배창호 감독의 웬만한 영화에는 모두 주연으로 나섰던 안성기 역시 이명세 감독의 ‘천재적 영화재능’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당연히 ‘개그맨’에도 배창호 감독과 함께 주연으로 나섰지요. 비록 ‘개그맨’이 상업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명세라는 영화작가’의 탄생에 일조한 것이지요.
80년대의 안성기 배창호 이명세, 세 사람의 관계는 당시 영화계에서 흔치 않은 ‘영화동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직업 이전에 예술로 바라보는 시각이 비슷했고, 영화를 통해 꿈을 만들어가는 지향점이 같았습니다. 여기에다 세 사람 모두 공통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지녔기에 늘 함께 작업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성전자 제품개발실의 회식 장면. 윤주상 부장(가운데)이 부하인 안성기 과장(오른쪽)의 목을 끌어안고 훈시하는 모습.
이명세 감독은 ‘개그맨’의 상업적 실패를 거울삼아 훨씬 대중적인 코드로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년)를 만들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만, 그 다음 작품인 ‘첫 사랑’(1993년)으로 또다시 ‘흥행과는 거리가 먼 감독’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영화작가로서의 평가는 그대로였으나 영화제작사나 투자자들로부터는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된 거지요. ‘남자는 괴로워’의 기획 제작 역시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 감독이 직접 쓴 시나리오는 매우 유니크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꿈을 월급봉투에 가둔 채 지친 삶을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애환을 그린 코미디였습니다.
하지만 처음엔 선뜻 나서는 제작사가 없었습니다. 결국 안성기가 주연배우로 나서기로 했다는 소식에 이어 ‘장군의 아들’시리즈로 성가를 올린 박상민, 그리고 이명세 감독과 ‘첫사랑’을 함께 했던 김혜수 등의 캐스팅 라인업으로 인해 당시 서울 종로3가의 피키디리극장을 겸영하고 있던 익영영화사(대표 박상인)가 제작을 결정했습니다.
회식장면에서 과잉 제스처(두 팔을 들고 있는)로 좌중의 시선을 끌고 있는 신입사원 박상민.
‘남자는 괴로워’의 제작 초기, 일본에서 최장수 시리즈(48편)로 제작된 동명의 영화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한 게 아닌가 하는 시선도 없지 않았으나 이 감독의 독창적인 시나리오임이 밝혀져 이같은 논란을 잠재웠지요. 여기에다 영화 또한 이 감독 특유의 미장센과 과장된 연기, 뮤지컬 요소 등이 뒤섞여 ‘슬랩스틱 뮤지컬 코미디’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완성되어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찰리 채플린을 연상케 하는 블랙코미디의 향연”이라거나 “시네아스트 이명세의 진가를 유감없이 드러낸 수작”이라는 평가가 줄을 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안성기 과장이 비 오는 날, 술 한잔하고 거리로 나와 가로등을 파트너 삼아 “이 세상의 부모 마음, 다 같은 마음, 아들 딸이 잘되라고 행복하라고,,,, 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청춘, 브라보! 브라보! 아빠의 청춘”에 맞춰 노래하며 춤추는 ‘우산댄스’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되었습니다.
‘남자는 괴로워’의 메인 포스터로도 사용된 이 장면 위에 씌어진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카피에서는 강한 남자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샐러리맨의 애환과 연민이 고스란히 전해졌지요.
상사의 결재를 받기 전에 화장실에 들러야 하는 소심한 타입의 안성기 과장.
미국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주인공 진 켈리가 빗속에서 춤추는 장면을 패러디한 듯한 이 장면은 훗날 ‘남자는 괴로워’의 명장면으로 꼽히기까지 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영화 속의 등장인물 이름이 모두 배우의 실명과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영화 속의 오성전자 제품개발실의 안성기 과장이나 능력있는 커리어우먼 김혜수, 김혜수를 짝사랑하는 ‘마마보이’ 신입사원 박상민, 안성기 과장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진급이 빠른 송영창 차장, 직원들을 들볶기만 하는 윤주상 부장, 불륜에 빠진 조선묵 대리 등이 모두 실제의 배우 이름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괴로워’도 비평가들의 호평과는 달리 관객들의 호응은 얻지 못했습니다.
안성기 김혜수 박상민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포진했음에도 일반적인 영화에서 기대하는 재미와는 동떨어진 다분히 과장된 연기 앙상블과 미장센 등이 관객에게는 낯설게 느껴진 탓이었습니다. 결국 피카디리 극장에서 제작한 영화임에도 일주일 남짓만에 스스로 극장 간판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시네아스트 이명세 감독에게는 유난히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수식어를 갖다붙인 영화들이 많습니다. 데뷔작이었던 ’개그맨‘에 이어 ’첫사랑‘. 그리고 ’남자는 괴로워‘까지.
하지만 몇 년 후 이명세 감독은 다시한번 안성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년)를 찍었고, 마침내 비평과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해외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의 일입니다. (이창세 영화기획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남자는 괴로워'의 메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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