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가 ‘신바람’을 내고 있다. ‘잘 뽑은 4번 타자’ 로베르토 라모스(26)의 힘이 그라운드를 달구고 있기 때문이다.
LG는 25일 현재 최근 10게임에서 7승3패, 올 시즌 11승6패로 단독 2위를 달리고 있다. 3위 두산과는 1게임 차이인 탓에 하루하루 희비가 엇갈릴 수 있지만 기분 좋은 출발임이 분명하다.
라모스는 빅리그 경험이 없는, 멕시코 출신의 ‘무명’으로 계약금과 옵션을 포함해 총액 60만 달러로 LG에 둥지를 틀었다. 계약금은 5만 달러, 연봉 30만 달러. 올 시즌 KBO리그에서 뛰고 있는 외국인 선수 중 최하위권 몸값이다.
▲ LG 4번 라모스(왼쪽)가 지난 24일 잠실 KT전에서 5-7로 뒤진 9회말 1사 만루에서 오른쪽 담장을 넘어가는 끝내기 역전 그랜드슬램을 터뜨린 뒤 홈으로 들어와 동료들의 축하 속에 포효하고 있다.
그러나 뚜껑을 열자 확실하게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다. 벌써 홈런 7개로 1위, 장타율 7할6푼7리로 1위를 기록 중이다. 총 17게임에 나가 타율 3할5푼과 16타점. 기대 이상이다.
벌써부터 KBO리그를 거쳐 메이저리그로 금의환향한 테임즈, OB 시절 홈런왕을 경험한 뒤 일본으로 진출해 부와 명예를 다잡았던 우즈와 비교될 정도다.
라모스가 지난 24일 생애 첫 짜릿한 경험을 했다. 잠실구장에서 끝내기 역전 만루포를 날려 ‘대단한 타자’임을 입증했다.
KBO 역대 20번째 끝내기 만루 홈런이자 통산 8번째 끝내기 역전 그랜드슬램의 주인공이 됐다.
# 5월24일 잠실구장, LG-KT전 9회말
LG는 4-7로 뒤진 채 9회말 공격을 시작했다. 패색이 짙었다.
KT 이강철 감독은 4-4 동점이던 7회초 3점을 추가하며 승기를 잡자 7회말까지 105개의 공을 던진 선발 쿠에바스 대신 8회말부터 하준호를 투입했다. 충분히 쿠에바스와 팀의 승리를 모두 지켜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준호는 8회말 선두타자 5번 김민성에게 볼넷을 내줬지만 6번 정근우를 3루수와 2루수, 1루수로 이어지는 병살타로 처리한 뒤 7번 김용의도 유격수 플라이로 잡아냈다.
그러나 9회말 갑작스레 하준호가 흔들렸다. 선두타자 8번 유강남에게 연거푸 3개의 볼을 던지더니 풀카운트에서 볼넷을 허용했다. LG 벤치에선 유강남 대신 1루 대주자로 구본혁을 내세웠다. 그리고 9번 오지환 대신 정주현을 대타로 투입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무사 1루,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하면서 아웃카운트를 늘려 가면 순조롭게 승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하준호는 정주현과의 승부에서 더욱 흔들렸다. 초구에 스트라이크를 잡았지만 2구부터 내리 4개의 볼을 던졌다. 무사 1, 2루. 큰 것 한 방이면 동점.
▲ LG 라모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맞은 KT 투수 김민수.
KT 벤치가 급했다. 부랴부랴 하준호 대신 김민수를 구원 투수로 투입했다. LG도 ‘맞불 카드’를 뺐다. 1번 홍창기 대신 베테랑 왼손 타자 박용택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박용택 카드’는 실패. 유격수 플라이로 물러났다. 주자들을 진루시키지도 못했다.
너무 빨리 긴장을 푼 탓일까. 김민수는 2번 김현수의 우전 안타를 맞았다. 2루 주자 구본혁이 홈까지 내달려 5-7로 추격했다. ‘산 너머 산’이었다. 3번 채은성은 중전안타로 1사 만루를 만들었다. 1루 대주자는 신민재. LG 류중일 감독은 한발이라도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주자로 베이스를 채웠다.
KT 이강철 감독은 김민수를 고집했다. 4번 지명타자로 출전한 라모스가 앞 타석까지 4타수 무안타로 무딘 모습을 보였으니 잘 막아내리라 믿었다.
초구는 볼, 2구는 시속 143km짜리 바깥쪽 직구로 스트라이크. 3구는 파울볼. 4구는 다시 볼. 김민수는 나름대로 여유있는 볼 카운트 싸움을 이끌었다.
볼 카운트 2볼 2스트라이크. 김민수는 5구째 변화구를 선택해 라모스의 몸쪽 아래로 떨어지는 공을 던졌다. 시속 131km.
라모스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몸이 먼저 따라 나가지 않았다. 방망이의 궤적을 따라 자연스레 중심 이동을 하면서 타구의 힘을 실었다. 오른쪽 담장을 넘어가는 만루 홈런.
▲ LG 주장 김현수(가운데)가 지난 24일 잠실 KT전 9회말 4번 라모스의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으로 홈을 밟으면서 뛰어오를 듯 기뻐하고 있다.
순식간에 전세가 뒤집혔다. 3루 주자 정주현, 2루 주자 김현수, 1루 주자 신재민이 차례차례 홈을 밟았다. 라모스는 당당하게 다이아몬드를 돈 뒤 홈 플레이트 근처에 오자 마치 ‘버저비터’를 던졌다는 듯 헬멧을 벗어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을 향해 슈팅 동작으로 자축 세리머니를 즐겼다.
LG가 9-7로 이겼다. 이보다 더 짜릿할 수 있을까. 4번 라모스는 ‘멕시코산 복덩이’였다.
# 끝내기 만루포, 원년 이종도부터 대타 이택근도 있다
한국프로야구는 1982년 출범했다. 3월27일 개막전이 열렸다. 동대문구장에서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가 맞붙었다.
첫 게임부터 흥미진진한 승부가 펼쳐졌다. 흥행몰이를 할 수 있는 요소를 모두 보여줬다. 특히 MBC는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 홈런으로 연장 승부를 마무리, 팬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심었다.
MBC와 삼성은 9회까지 7-7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원년 개막전부터 연장전. 연장 10회초를 무실점으로 막아낸 MBC는 10회말 기회를 잡고, 이종도가 이선희를 무너뜨렸다.
당시 최고의 좌완으로 평가받던 이선희는 이날 이후 ‘비운의 투수’로 남는다.
KBO리그 첫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의 주인공은 삼성 이동수. 1995년 7월25일 대구 시민구장에서 열린 한화전에서 3-6으로 뒤진 9회말 구대성을 두들겨 역전극을 연출했다.
끝내기 홈런은 타자에겐 잊지 못할 기쁨의 기억이고, 투수에겐 잊고 싶은 악몽이다.
현역 타자 중 넥센 이택근은 2017년 5월18일 고척 돔에서 열린 한화전에서 4-6을 뒤진 9회말 대타로 나가 역전 끝내기 그랜드슬램을 기록하며 기쁨을 두 배로 만들었다. 이 때 마운드에서 고개를 숙인 투수는 특급 마무리 정우람.
▲ 프로 원년 MBC 이종도와 삼성 이선희처럼 끝내기 만루 홈런으로 웃고 울었던 넥센 이택근(왼쪽)과 한화 정우람.
정우람은 2009년 8월9일 군산구장에서 열린 KIA전에서도 김원섭에게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맞았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정우람과 함께 2차례나 끝내기 만루포의 희생양이 됐던 투수는 LG 신윤호.
마무리 전문 투수는 언제든 만루 위기와 싸워야 한다. 극복할 때도, 무너질 때도 있다. 스스로 버텨내야 할 과제다.
LG는 라모스가 끝내기 만루포를 날리는 순간 2009년 4월10일 페타지니가 두산 이용찬을 무너뜨린 순간을 11년 만에 떠올렸으리라. (이창호 전문기자/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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