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7월초 서울 종로3가의 피카디리 극장에서는 여름방학 상영작으로 ‘결혼이야기’(김의석 감독)가 개봉되어 관객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요즘의 멀티플렉스 시스템과는 달리 당시에는 이른바 개봉관(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 중심가에 위치한 극장)에서만 새 영화가 개봉되는 상황이었던 터라 피카디리 극장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인데도 불구하고 극장 앞 매표구에는 ‘결혼 이야기’의 입장권을 사려는 관객들이 길게 줄을 늘어섰습니다. 매표구에 늘어선 줄은 종로 3가 지하철역 입구를 돌아 인도에까지 이어졌습니다.
영화비평가들은 “한국 멜로영화에 새로운 지평을 연 로맨틱코미디”라면서 ‘결혼 이야기’의 장르적 매력 때문에 관객이 호응하는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실제로 멜로 드라마에 코미디를 접목시켜 신세대의 성 풍속도를 감각적으로 그려낸 점이 분명히 흥행요인의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젊은 관객들이, 특히 여성관객들이 열광했던 진짜 이유는 여주인공 심혜진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 때문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심혜진은 남자(최민수)와 동등한 인격체임을 당당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남자에게 종속되는 과거의 여성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아니, 그런 여성은 더 이상 이 시대에 존재하지 않음을 선언했습니다. 부부지간의 성(性) 문제에 관해서도 얼마나 솔직하고 대담하게 표현했는지요. 여성관객들은 박수를 치며 깔깔댔고, 기존의 관습이나 윤리 등을 걷어차버리는 여주인공의 당당함에 통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1994년 '결혼이야기2'에서 심혜진이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영원한 사라을 얻기 위해 호주 에어즈락으로 가는 스틸 컷.
심혜진은 ‘결혼 이야기’를 기점으로 여성들의 워너비로 등극했고, 영화배우로서의 전성기도 활짝 열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서구적인 외모를 앞세워 광고 모델로로 꽤 줏가를 올리고 있었지만 비로소 ‘배우다운 배우’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고나 할까요. 하기는 ‘결혼 이야기’에서의 이미지는 이전부터 그녀가 광고 모델로써 쌓아왔던 ‘당당한 커리어 우먼’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톡 쏘는 콜라 같은 여성’의 이미지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으니까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TV에 등장한 코카콜라의 30초짜리 광고 속에서 그녀는 그동안 한국사회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여성신장‘의 기치를 높이 든 모습으로 나타났던 겁니다. 남자동료들과 밝은 표정으로 격의없이 일하는 커리어 우먼으로 등장하는 이 광고에서 그녀는 그저 ’사무실의 꽃‘ 정도로 인식되던 통념을 단번에 깨뜨렸습니다. 남자를 유혹하는 듯한 윙크를 날리는가 하면 남자 동료를 업어치기로 메다꽂기도 하고, 팔꿈치로 남자의 얼굴을 가격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으니까요.
뿐만 아닙니다. 치마를 입은 채로 철봉을 하고, 치마를 입은 차림을 축구공을 차는 모습은 그동안 여성들에게 묵시적으로 강요되던 조신함의 굴레를 벗어던지게 하는 카타르시스를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파격 그 자체였지요.
심혜진 스스로도 어느 인터뷰에서 “영화 ‘결혼 이야기’를 보고나서 여성들이 수동적인 자리에서 벗어나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임을 인식하게 됐다고 얘기하는 게 가장 기뻤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심혜진은 ‘결혼 이야기’를 통해 1990년대 한국사회에 ‘남녀 동등’이라는 트렌드의 기초를 놓은 셈이 됐습니다.
말하자면 ‘결혼 이야기’를 통해 심혜진은 이전의 여성들이 남성에 대한 순종, 복종, 희생적이거나 섹슈얼 무드로 일관했던 것과는 달리 남성 우월자(최민수)에 당당히 맞서 자기 주장을 펴고 과감하게 애정표현을 하는 현대적인 캐릭터로 우뚝 선 겁니다.
1994년 영화 '세상 밖으로(여균동 감독)' 심혜진 스틸 컷.
심혜진은 ‘결혼 이야기’의 호연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한국 영화계의 보석같은 존재감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섬에 가고 싶다’(1993년, 박광수 감독)를 비롯해서 ‘비상구가 없다’(1993년, 김영빈 감독), ‘세상 밖으로‘(1994년, 여균동 감독), ’손톱‘(1995년, 김성홍 감독),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6년, 오병철 감독), ’박봉곤 가출사건‘(1996년, 김태균 감독), ’은행나무 침대‘(1996년, 강제규 감독), ’초록 물고기‘(1997년, 이창동 감독),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1998년, 강우석 감독) 등 90년대 중후반에는 마치 여배우는 심혜진 밖에 없는 듯 싶을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이 무렵 기획 제작되던 한국영화들은 대부분 그녀에게 시나리오를 건넸습니다. 그녀의 출연 여부가 영화 제작의 첫 단추처럼 여겨졌으니까요.
이중에서도 그녀는 배우란 어떤 존재인지, 영화란 어떤 예술인지에 눈을 뜨게 해줬던 ‘그들도 우리처럼’의 박광수 감독과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다시 만나 영화작업에 흠뻑 젖어있던 시간을 “영화배우로서의 성취가 가장 컸던 순간”으로 꼽습니다. 박광수 감독이 직접 제작사를 설립하고 나선 작품이기도 했지만, ‘예술로서의 영화’를 만끽했기 때문이지요.
심혜진은 90년대 한국의 여러 영화상 시상식에서 대부분 수상한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1996년에는 아주 진기한 기록으로 평가되는, 한국영화계의 3대 영화상이라고 불리는 대종상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의 여우주연상을 ‘싹쓸이’ 수상했습니다. 그런데 진기한 기록이라고 하는 이유는 세 영화상에서 수상의 영광을 안게 된 작품이 모두 달랐기 때문입니다. 대종상에서는 ‘은행나무 침대’로, 청룡영화상에서는 ‘박봉곤 가출사건’으로, 백상예술대상에서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로 각각 수상했습니다. 이 기록은 한국영화계의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깨질 가능성이 별로 없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리고 대종상 여우주연상의 경우에는 1993년(결혼 이야기), 1996년(은행나무 침대), 1997년(초록 물고기) 등 3회 수상한 기록도 갖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심혜진 외에 한국영화사에서는 최은희, 윤정희, 강수연 등 세 명만이 갖고 있습니다. 90년대 심혜진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는 증표입니다. 심혜진의 배우로서의 근성이 연기력과 흥행성을 두루 갖춘 여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겁니다.
1995-97년 심혜진 인터뷰(스포츠코리아 사진DB)
그런데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심혜진을 스크린에서 만나는 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TV드라마(MBC 미니시리즈 ‘마지막 전쟁’)로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빚어진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거의 5~6년간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 것은 필경 무슨 속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 추측은 이내 홍콩의 왕가위 감독과 ‘2046’이라는 제목의 영화 ‘를 준비중이라는 뉴스로 이어졌습니다. ‘중경삼림’ ‘화양연화’ 등의 영화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지닌 왕가위 감독과의 영화작업이라는 소식에 한국 영화 관계자들도 덩달아 비상한 관심을 가졌지요.
하지만 왕가위 감독과의 영화작업은 거의 3년여 동안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지 못한 채 지지부진하다가 끝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심혜진으로서는 여러 가지로 손해를 입어야 했지요. 연기활동의 공백은 자연스럽게 슬럼프로 이어졌으니까요. 주 활동 무대를 TV쪽으로 옮기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이에 영화 ‘아카시아’(2003년, 박기영 감독)에 출연한 적이 있었으나 작품으로나 흥행면에서나 별로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 심혜진은 대반전을 이뤄냈습니다. 그해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궜던 MBC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 검은 색 드레스를 입은 뱀파이어 ‘프란체스카’로 출연해 단박에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잡았습니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흥미있는 사실은 90년대 최고의 여배우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심혜진이 흔히 신인들의 등용문처럼 여겨지던 시트콤에 출연했다는 점이었지요. 시트콤 출연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안녕, 프란체스카’의 큰 성공 이후 심혜진은 당시의 심정을 “갇혀있던 성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마음”이라고 회고했습니다. 그 갇힌 성에서 현명하게 나간 셈입니다.
심혜진은 최근까지도 TV드라마를 통해 활발하게 연기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는 역할들을 큰 욕심없이 해나가고 있지요. 아무래도 안정적인 결혼생활에서 오는 여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1999년 심혜진 인터뷰(스포츠코리아 사진DB)
1995년 영화 '손톱(김성홍 감독)의 심혜진과 진희경 수영장 촬영.
2005년 제 41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 참여한 심혜진.
2005년 심혜진의 시네타운.
2006년 SBS 드라마 '돌아와요 순애씨(한정환 연출)'의 공항촬영현장에서 심혜진이 박진희 사진판 앞 연기장면.
2006년 심혜진.
2007년 XTM 방송 사회자 심혜진.
2007년 제 44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심혜진.
2008년 영화 '흑심모녀(조남호 감독)' 제작보고회에 참석한 심혜진.
2008년 45회 대종상영화제에 참석한 심혜진.
2015년 KBS 예능 '용감한 가족'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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