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여러분. 2014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오랜만에 인사를 드리려 하니 설레기도 하고 떨리기도 합니다.
2014년 한 해가 시작된 느낌, 어떠세요? 벽에는 새로운 달력이 걸리고, 생각해보면 시간이 지나도 변한 게 없는데 어느새 훌쩍 나이를 먹고 말았네요. 시간은 그렇게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조용히 흐르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일까, 오늘은 거울 속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어디 달라진 곳이 없나? 20년 전 내 모습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10년 전, 5년 전, 1년 전, 그리고 지금의 내 모습은 그동안 얼만큼 변해온 것일까요. 거울 속 나에게 말이라도 걸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온 거지?
세월의 흔적, 삶과 시간, 주변의 환경이 많은 것을 변하게 하지만 나다운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생각해봅니다. 그 많은 시간 동안 꿋꿋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나에게 오늘은 더많이 사랑한다고 얘기해줘야겠어요.“
2014년 1월 7일, 은퇴를 선언하고 자연인으로 돌아간 지 13년만에 심은하는 마이크를 잡고 대중 앞에 나타났습니다. 기독교 선교방송인 극동방송 라디오 ‘심은하와 차 한 잔을’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녀는 매일 아침 9시 40분부터 5분간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의 DJ로 1년 4개월 동안 마이크 앞에 앉았습니다.
당시 그녀의 차분하면서도 정감 넘치는 목소리는 청취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청취자들의 반향이 어땠는지는 방송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그녀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그녀의 ‘방송하차’를 아쉬워하는 청취자들의 댓글이 방송국 게시판을 도배하다시피한 겁니다.
“행여 놓칠세라, 라디오 앞에 바짝 붙어있던 날들이었는데,,, 많이 아쉽습니다”라는 댓글에서부터 “처음에는 정말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심은하씨 맞나 반신반의했었는데, 들을수록 은혜가 되어서 그런 건 다 잊고 그날그날 말씀에 곰곰이 집중했지요. 이젠 그 풍성한 내용을 다시 복습해가야겠네요. 고마웠고, 감사했습니다. 마음에서 잊지 못할 거예요!”라는 진솔한 심경이 담겨있는 댓글들까지 온통 그녀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심은하 역시 마지막 방송에서 “집은 아름다운 생각을 키우고 꿈을 그려 나가고, 이웃과 따뜻한 소통을 이뤄가는 곳이지요. 저에게는 이 시간이 아름다운 마음의 집을 짓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마지막 인사를 드리면서 청취자 모든 분들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도드리겠습니다”라고 13년만의 컴백을 마무리하는 소회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잘 알려진 것처럼 심은하는 2016년 국회의원 선거에 나선 남편 지상욱(새누리당)을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조용히 내조하는 모습을 보였지요. 물론 남편의 당선 후에는 카메라 앞에 나와 함께 포즈를 취하기도 했구요.
영화 '본 투 킬'(1996년, 장현수 감독)에 출연한 심은하.
심은하는 데뷔 때부터 ‘될 성 부른 떡잎’으로 평가받은 배우입니다. 1994년 방영된 MBC TV드라마 ‘마지막 승부’에서 그녀는 장동건 손지창, 두 남자 주인공들로부터 동시에 구애를 받는 ‘정다슬’로 나와 단박에 시선을 모았습니다. 청순한 이미지와 맞물려 한동안 남학생들의 책받침 1순위 배우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다슬이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그녀의 다음 행보였습니다. ‘마지막 승부’와는 전혀 다른 색깔의 납량특집 공포드라마 ‘M’(1994년, MBC TV)의 출연을 결정했습니다. ‘마지막 승부’로 얻은 청순 이미지의 울타리 안에 안주하기를 마다한 겁니다. ‘메디컬 공포드라마’라는 형식으로 기획된 ‘M’에서 그녀는 초록눈빛을 드러내며 선과 악을 넘나드는 팜므파탈의 캐릭터로 변신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변신은 또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당시 시청률이 50%을 넘었으니까요. 그녀의 도전정신이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만 해도 영화와 TV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다분히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주로 영화 쪽에서, TV드라마에 출연하는 탤런트들은 주로 TV드라마 쪽에서만 활동했던 겁니다. 안방극장에서 얻은 인기를 업고 영화쪽으로 진출해서 ‘재미’를 본 탤런트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요. 90년대 안방극장의 최고 히로인 중 한명인 채시라의 경우에도 영화 출연은 ‘네온 속으로 노을 지다’ 단 한 편뿐이었으니까요. 그나마도 대중적으로나 작품적으로도 성공을 하지 못했지요.
그런데 심은하는 신인 시절부터 영화와 TV 드라마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곧잘 뛰어넘었습니다.
‘마지막 승부’와 ‘M’ 등의 연속적인 히트로 많은 영화와 TV 드라마의 캐스팅 0순위로 떠올랐을 때, 그녀는 다른 탤런트들과는 달리 영화 쪽 진출을 결정했습니다. ‘아찌 아빠’(1995년, 신승수 감독)였습니다. 상대 배우는 당시 ‘결혼이야기’(1992년, 김의석 감독)와 ‘테러리스트’(1995년, 김영빈 감독) 등의 성공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최민수였습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년, 허진호 감독)에 출연한 심은하.
아찌 아빠’에서 심은하는 외국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한 불량소녀 ‘유리‘역을 연기했습니다. 낮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밤에는 환락가를 헤매고 다니면서 절도행각도 서슴치 않는 캐릭터였습니다. 이 또한 청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리고 상대역인 최민수와의 나이 차이도 10살 이상 났습니다만 거리낌 없는 멜로연기까지 펼쳤습니다. ’아찌 아빠‘에 대한 비평이나 관객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만 심은하의 매력과 가능성은 충분히 알렸습니다.
심은하의 대표작은 뭐니뭐니 해도 ‘8월의 크리스마스’(1998년, 허진호 감독)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그야말로 ‘배우 심은하‘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주차단속요원 ’다림‘이라는 캐릭터는 심은하에 의해서 화사하게 살아났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담아낸 장면들 하나하나에 심은하는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시한부인생을 살아가는 사진관 주인 정원(한석규)과 처음 만나고, 주차단속사진 인화를 맡기러 사진관을 드나들면서 한석규와 미묘한 감정을 쌓아나가는 모습까지 어쩌면 그리도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해냈는지요.
영화 '아찌 아빠'(1994년, 신승수 감독)에서 불량소녀 '유리'역을 맡아 이미지 변신을 꾀한 심은하.
특히 아무런 연락도 없이 홀연히 사라져버린 정원(한석규)의 사진관에 돌을 던지는 장면과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진관을 찾아와 창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던 심은하가 사진관 진열창에 걸려 있는 자신의 사진을 보고 환하게 웃는 마지막 장면은 심은하 연기의 백미입니다.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 품격 높은 멜로드라마’라는 평가를 얻게 된 데는 심은하의 연기내공이 단단히 한 몫 했습니다.
심은하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의 빼어난 연기력을 인정받아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비롯해서 백상예술대상, 영화평론가협회상 등 1998년의 영화상들을 독식하다시피 했습니다. ‘아찌 아빠’ ‘본 투 킬’ 등의 영화 실패를 딛고 일어선 ‘심은하의 재발견’이었습니다.
여세를 몰아 그녀는 ‘미술관 옆 동물원’(1998년, 이정향 감독)에도 연이어 출연했습니다. 라면 한 그릇을 받아들고도 괴성을 지르며 좋아하는 ‘춘희‘라는 인물을 연기했는데, 짝사랑에 허우적대다가 서서히 사랑을 알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한국영화사상 가장 사랑스러운 캐릭터”라는 찬사까지 들었겠습니까.
심은하는 이 무렵 SBS TV 드라마 ‘청춘의 덫’(1999년)에서 다시한번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습니다. 남편의 배신에 복수하는 여주인공으로 등장해 “당신, 부숴버릴 거야!”라는 대사를 유행시킬 정도로 ‘물 오른 연기’를 선보였지요. 배우들에게 까다롭기로 유명한 김수현 작가조차 그녀에게는 늘 칭찬만 했다는 후문이었으니, 그녀가 얼마나 절정의 연기력을 구사했는지 짐작케 합니다.
심은하는 늘 도전적인 자세로 작품을 선택하고 연기했습니다. 인기 절정의 그녀를 필요로 하는 영화와 TV 드라마들이 줄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그녀의 선택은 늘 실험적이었으니까요. 대중성이 없어보이는 영화 ‘이재수의 난’(1999년, 박광수 감독)이 그랬고, 다분히 독렵영화의 성격을 띤 ‘인터뷰’(2000년, 변혁 감독)의 출연 결정도 그랬습니다. 이 두 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 이정재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촬영에 들어가면 심은하라는 배우는 사라지고 오롯이 인물만 남아 있어요. 영화 전체 촬영을 모두 끝내야 비로소 심은하가 다시 돌아오지요”
그녀의 어린 두 딸이 영화 ‘인천상륙작전’(2016년, 이재한 감독)에 특별출연했다고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만 그녀의 연기는 언제쯤 다시 보게 될까요? 사뭇 궁금해집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출연하던 당시 심은하의 다양한 포즈들.
TV와 영화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도전적인 연기활동을 펼친 심은하.
2005년 심은하 지상욱 결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