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프로야구의 싹이 움트기 시작한 것은 75년 11월이다. 60년대 초 미국에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전선관 사업으로 재산을 모은 홍윤희가 프로야구 창설을 목적으로 귀국, 국내 야구인들과 접촉한 끝에 긍적적인 반응을 얻어내면서 꿈이 무르익어 갔다.
국내 야구인들은 국민의 여가선용을 위해서도 프로야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었다. 또 그 길만이 침체한 실업야구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홍윤희는 국내 야구인들이 프로야구 창설에 좋은 반응을 보이자 필요한 자금을 만들기 위해 일단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다시 귀국한 것은 76년 1월 말. 거금 20만 달러라는 자금을 준비해 왔다. 2월 5일에는 김계현(金桂鉉·한국전력 감독), 박현식(朴賢植·제일은행 감독), 정두영(鄭斗永·철도청 감독), 장태영(張泰英·상업은행 감독), 허정규(許正奎·농협 감독), 허종만(許宗萬·육군감독), 이호헌(李虎憲·실업연맹 사무국장) 등과 가칭 "한국직업야구준비위원회"를 만든 뒤 위원장을 맡았다.
홍윤희는 프로야구의 청사진도 밝혔다. 첫 해인 76년은 프로야구의 정지작업을 위해 실업야구 10개 팀을 각 시, 도에 배정한 뒤 서해와 동해리그로 나누어 출범하되 팀 당 130경기를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치르고 두 리그의 우승 팀이 코리언 시리즈에서 패권을 가린다는 거였다.
선수들에 대한 대우는 연봉제를 도입, 최저 2백40만원으로 하되 성적 및 관중 동원 수에 따라 보너스를 지급하고 77년에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인천 등지에 본거지를 둔 6개 구단을 주축으로 2개 리그를 정식 출범키로 했다. 또 78년에는 서울과 전주에 1개씩 2개 팀을 증설, 8개 팀으로 늘리기로 했다. 79년부터는 한국을 비롯해 미국, 일본, 멕시코 등 4개국 팀이 참가하는 월드시리즈를 추진하고, 80년엔 국내 8개 팀과 일본 12개 팀을 주축으로 아시아리그를 창설한다는 원대한 꿈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꿈도 실업 팀의 지역 안배에 따른 이해 득실과 지방 구장의 야간 조명시설 설치가 난제로 불거져 벽에 부딪혔다. 지역 안배는 이해 당사자들이 절충할 경우 원만히 수습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야간 조명시설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는 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3월 3일 주무 부서인 문교부를 비롯해 내무부, 상공부, 재무부 및 대한체육회 관계자들이 간담회를 가졌다. 하지만 이렇다 할 결론을 얻어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앞장 서서 지지해 줘야 할 대한체육회 마저 "야구의 지방 분산 개최는 불가능하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프로야구 창설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런 사정을 낱낱이 알고 있는 이호헌이 프로야구 창설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당연했다. 그는 또 자신도 있었다. 76년에는 개인이 주도하는 바람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정부가 주도하는 입장이어서 실패는 없다고 내다 보았다. (홍순일/news@photoro.com)
<사진 설명> 프로야구 탄생의 산파역을 맡았던 이호헌씨. 그는 75년 실업연맹 사무국장으로 홍윤희씨가 추진했던 직업야구 창설 준비위원으로도 활약했다. 프로야구가 탄생한 뒤에는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차장을 지냈다.
이전글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