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위원회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한 이용일씨(사진 앞줄 오른쪽). 90년 11월 30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91년 한·일슈퍼게임 개최를 앞두고 가진 일본 주니치신문 가토 회장과의 조인식 장면
이호헌에게 청와대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9월 초순께다. 우병규 정무 제1 수석 비서관이 전화로 알려왔다. '이상주 교문 수석 비서관이 야구관계로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박영길을 만나 청와대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던 이호헌은 이 제나 저 제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즉각 달려갔다. 이수정(李秀正) 비서관의 안내로 이상주 수석을 만났다. 그는 이호헌을 보자 10년 지기를 만난 듯 반색을 하며 손을 잡았다.
"후에 알게 됐지만, 이 수석이 박영길 감독을 만나 야구계 실정을 파악하고 난 직후 우병규(禹炳奎) 정무 제1 수석 비서관이 나를 추천 했다는 것이다. 'KBS에서 야구해설을 맡고 있는 이호헌일 만나보면 무얼 어떻게 할지 좀더 구체적인 윤곽이 잡힐 것'이라고 해서 나를 찾았다고 했다."
이호헌과 우병규 수석은 마산상고 동기동창으로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이 때만 해도 이호헌은 80년 10월 군부의 숙정작업에 휘말려 대한야구협회 운영부장 직을 내놓고 할 일 없이 놀고 있었다. KBS의 야구해설을 맡고 있었지만 야구가 매일 벌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소일거리에 불과 했다.
누구보다 이런 이호헌의 처지를 잘 알고 있던 우병규 수석이 친구를 추천한 것은 야구에 관한 자문도 필요했지만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이 수석을 만났더니 박영길을 비롯해 축구계 인사들을 만난 것 등등을 보고하듯 들려준 뒤 '속이 확 풀릴만한 얘기를 못 들어 답답해서 한번 만나 보고 싶었다'고 했다. 특히 축구 쪽 얘기를 많이 들려줬다. 축구 쪽에선 축구장 시설 자금으로 1백39억원을 정부 쪽에서 지원해 주길 원하고 있었다. 이런 막대한 돈을 풀어 프로축구를 탄생시키기엔 여력이 없다고 했다. 한 마디로 말해 돈 안들이고 프로야구를 탄생시킬 수 있는 길이 없겠느냐는 거였다."
방법이 왜 없을까? 있었다. 76년 재미 실업가 홍윤희가 짠 직업야구 창단 계획서를 원용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는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지방 구장의 야간 조명 시설이었다. 홍윤희는 이 비용으로 1개 구장에 5억원씩 30억원을 잡아놓고 있었다. 문제는 이 자금의 염출이었다. 그 방법만 찾아내면 정부의 자금 지원 없이도 프로야구를 탄생시킬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정부 쪽에서 재정 지원을 해준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체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잘하면 돈 한 푼 안들이고 프로야구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이호헌의 말에 이 수석은 깜짝 놀라며 "그런 방법이 있느냐?"고 반색을 했다. 이호헌은 "있지요. 있습니다. 1주일 안으로 마스터 플랜을 만들어 갖고 오겠습니다" 라고 응수 했다. 이 말은 들은 이상주 수석은 "좋습니다. 꼭 부탁합니다. 우리 손으로 프로야구를 한번 탄생시켜 봅시다" 라고 말하며 이호헌의 손을 덥썩 잡고 흔들어 댔다.
청와대를 나온 이호헌은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를 맡았다가 80년 10월 군부의 입김으로 같은 처지가 된 이용일을 만났다. 그도 박영길로부터 정부의 스포츠 프로화 추진 작업을 들은 터라 야구의 프로화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홍순일/news@photo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