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년 10월 28일 D일보가 프로야구 창립 움직임을 보도, 세상에 알려지자 전국 주요 신문들은 하루 늦은 10월 29일 '프로야구 탄생'을 일제히 보도했다. 금호의 불참은 D일보의 보도와는 상관없이 재무구조의 부실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대한교육보험도 호남의 대표적인 기업이었지만 또 거절을 당할 것 같아 문을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호남은 일단 접어두고 충청도를 맡을 기업을 찾아 나섰다. 충청도의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동아건설과 한국화약이 있었다."
이호헌은 동아그룹 계열사인 대한통운으로 김경태(金慶泰) 전무를 찾아가 열나게 취지를 설명했다. 역시 반응은 시큰둥했다. "개인적으로는 찬성하지만 혼자서 결정할 일이 아니므로 동아그룹 사장단회의에서 논의해 보겠다"고 했다. 거절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프로야구가 탄생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끌 때 들은 얘긴데 사장단회의에서는 전원이 프로야구 참여를 찬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원석 회장이 반대해 무산 됐다는 것이다. 당시 최 회장은 탁구협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최 회장은 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있어 탁구에 전념, 금메달을 따기 위해 매진하겠다며 사장단의 건의를 물리쳤다는 거였다."
출발이 너무 쉬워 낙관했던 이호헌과 이용일은 암초를 만난 듯 난감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광주일보 김종태(金宗太) 사장을 찾아갔다. 대한야구협회 부회장까지 겸하고 있어 심금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이였다. 화제는 자연 프로야구 창립 쪽으로 흘렀다.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호남 쪽에서 프로야구 할 만한 기업을 소개해 달라"는 제의까지 하게 됐다. 김 사장은 한참을 숙고한 끝에 대한교육보험을 추천했다.
그러잖아도 대한교육보험은 제3의 후보로 굳혀 있는 상태였다. 김종태 사장의 제의로 힘을 얻어 대한교육보험을 찾아가기로 했다. 대한교육보험 자체는 호남지역과 연고는 없었다. 하지만 설립자인 신용호(愼鏞虎) 회장의 고향이 전남 영암이어서 큰 기대를 걸고 찾아갔다. (홍순일/news@photo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