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에 연고를 둔 기업을 찾는 문제는 무엇보다 중요하고 급했다. 이호헌은 호남지역을 제외한 상태에서 프로야구가 성공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또 정부가 프로야구를 출범시키려는 의도에도 어긋난다고 보았다. 이호헌은 이때만 해도 정부가 프로야구 출범을 서두르는 것은 광주 사태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보았다. 때문에 광주 사태의 주역인 호남을 제외한 상태에서 출범시켜는 안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호남지역에 프로야구는 태어나야 했다. 기업이 나서지 않으면 김종태 사장의 말대로 도민들의 주를 모집해서라도 팀을 꼭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연고 기업들인 삼양사와 금호그룹에 이어 대한교육보험까지 등을 돌린 뒤 김종태 사장도 바빠졌다. 이호헌과는 별도로 해태제과의 박건배 사장과 수시로 접촉하며 프로야구 창단의 꿈을 불태웠다. 이호헌도 맥놓고 앉아있지 않았다. 이호헌도 그 나름대로 뛰었다. MBC가 추진하던 프로야구 창단 작업에 손을 대고 있던 김동엽(金東燁)을 중간에 내세워 해태 박건배 사장을 설득했다. 박 사장은 김동엽의 경복고 후배이기도 했다.
"이 때만 해도 나는 해태 박 사장을 전혀 몰랐다. 해서 김동엽에게 박 사장을 만나 프로야구에 참여할 뜻이 있는지 속마음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김동엽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경기 강원지역 연고기업으로 내정됐던 현대가 발을 뺀 뒤였다. 박 사장이 확답은 안 했지만 참여할 뜻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광주일보 김종테 사장과 함께 찾아가 만났다. 그 자리에서 박 사장은 청와대 관계자를 만나 내용을 들어본 뒤 결정하겠다고 했다."
청와대 관계자란 이상주 수석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는 자리는 어렵지 않게 마련됐다. 이상주 수석은 프로야구를 왜 만들어야 하는 지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가며 설명을 했다. 박 사장은 한참 듣고 있다가 결심한 듯 분명하게 말했다.
"잘 알았습니다. 호남지역은 우리가 맡지요."
그 순간 이호헌은 막혔던 체증이 확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박건배 사장은 또 다른 조건을 내세웠다. 김동엽을 달라고 했다. 그를 해태 창단 감독으로 줘야 자신이 원하는 팀을 만들 수 있다는 거였다.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김동엽 아니라 그 보다 더한 사람을 감독으로 달라고 해도 아낌없이 줄 기분이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해태가 프로야구 참여를 결정했으니 이 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해태제과의 참여로 프로야구 창단 작업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럭키금성만 참여하면 지역에 상관없이 문화방송(MBC), 두산, 삼성, 롯데, 해태 등 6개 기업이 프로야구에 뛰어드는 셈이었다.
일간지들은 6개 구단이 선정되기도 전인 11월 10일을 전후해 프로야구가 17일 구단주회의를 거쳐 19일 정식 출범한다고 창립 일정을 보도했다. 아울러 커미셔너 후보들로 최규하 전 대통령을 비롯해 신현학, 박충훈 전 총리 및 이호 전 적십자사 총재,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 등을 나름대로 소개했다.
프로야구 창립을 위한 6개 구단주회의 날짜도 잡혔다. 당초 구단주회의는 11월 17일 장충동에 있는 '호텔 신라'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호남과 경기 강원지역을 맡을 기업으로 내정했던 금호와 현대가 빠져 11월 25일로 연기해 놓고 있었다. 다행히 해태가 프로야구에 참여할 뜻을 밝혔으므로 경기 강원지역을 맡을 기업만 찾으면 만사 OK였다.
이호헌은 다시 한번 럭키금성을 생각했다. 경기 강원지역과는 연고가 없는 기업이지만 부딪혀서 직접 설득해 볼 마음으로 이헌조 기획조정실장을 찾아갔다.
"이상주 수석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은 탓인지 프로야구에 참여할 듯 강한 의욕을 보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오너가 외국에 나가있어 지금 당장 결정할 수 없다는 거였다. 낭패였다. 럭키금성의 참여를 굳게 믿고 있다가 미온적인 대답을 들으니 기가 막혔다. 그것도 구단주회의를 3일 앞둔 마당에 이런 말을 들으니 몸이 닳을 수 밖에 없었다. 이헌조 실장은 오너가 외국에서 돌아오면 꼭 참여할 테니 결정을 조금 늦춰 달라고 했다."
이호헌은 갈등이 생겼다. 그러나 이미 정해진 구단주회의를 또 연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럭키금성의 요청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이호헌은 할 수 없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프로야구에 참여한다는 가정 아래 구단주회의에 일단 참석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헌조 실장은 펄쩍 뛰며 "그 건 안 된다" 고 했다. 절차상의 문제를 들어 오너의 승낙을 받기 전에는 그 어떤 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홍순일/news@photo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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