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 3월 26일 프로야구 개막 리셉션에 참석한 박영길 감독(오른족)과 신준호 롯데 구단주(오른쪽에서 2번째). 이들은 경남고 14회 동기 동창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 구단주는 83년 7월 5일 롯데의 성적이 바닥권을 헤매자 과감하게 박 감독을 해임해 버렸다.
롯데 자이언츠가 창단된 뒤 투수코치로 활약했던 김명성의 증언이다. 조동래 부사장은 팀이 창단 된 뒤 구단 사장을 맡았으므로 감독이나 코치 인선은 그의 소관이어서 박영길의 감독 선임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장태영은 경남중학에 재학 중이던 47년 제2회 청룡기쟁탈중등야구선수권대회와 제1회 황금사자기쟁탈전국지구별초청중등야구쟁패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왼손잡이 투수였다. 46년 제1회 청룡기대회에 유격수로 뛰어 준우승을 차지한 뒤 이 해에 투수로 전향해 두 대회를 석권함으로써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됐다.
그뿐이 아니었다. 장태영은 48년에 있었던 제3회 청룡기 대회와 제2회 황금사자기쟁패전에서 또 다시 우승을 차지해 부산이 낳은 '야구 신동'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장태영을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49년에 벌어진 제4회 청룡기대회에서였다. 대회 3연패를 노리며 결승전에서 광주서중의 김양중과 맞붙은 장태영은 11회 연장전에서 1-2로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영·호남을 대표하는 두 중학의 격돌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명승부로 오르내리고 있다.
이후 육군에 입대, 육군야구단 창단 멤버로 활동하다 60년 육군 소령으로 제대한 장태영은 교통부를 거쳐 62년 상업은행 감독을 맡아 72년까지 실업야구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때문에 호남야구 하면 김양중을 꼽듯 부산야구 하면 장태영을 첫 손에 꼽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로야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광주지역은 김양중씨가, 부산지역은 장태영씨가 맡아야 한다는 게 나나 이용일씨의 복안이었다. 옛날의 라이벌들이 프로야구에서 다시 대결하면 프로야구는 그만큼 인기가 높아져 관중 동원도 수월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김양중씨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해태 감독을 사양하는 바람에 장태영씨만 남게 됐다."
이호헌의 말이다. 그러나 장태영 역시 롯데 감독이라는 자리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더 큰 야심이 있었다. (홍순일/news@photo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