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0m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경신하며 우승한 선수는 네덜란드의 스벤 크라머였다. 6분 09초 76으로 자신의 기록을 정확하게 1초를 앞당기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사실 국내 팬들 중에도 스벤 크라머의 인지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그는 밴쿠버, 소치에 이어 평창동계올림픽에서도 같은 부문 우승을 차지한 스피드 스케이팅 장거리의 세계적인 선수이다. 이번 올림픽 우승으로 3연패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작성하고도 아직 올림픽 기록을 경신할 만큼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0m가 11일 오후 강원도 강릉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렸다. 네덜란드 스벤 클라머가 1위를 기록하고 환호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2005년 5,000m에서 세계 신기록 작성을 시작으로 장거리 경기인 5,000m, 10,000m에서 여러 차례 신기록을 세웠다. 2006년 토리노동계올림픽 무대에 첫 등장한 크라머는 5,000m 은메달, 단체 추발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2007년 ~ 2009년 3년 연속으로 세계 종목별 선수권 5,000m, 10,000m, 단체 추발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같은 기간 세계 종합 선수권도 재패하였다.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는 5,000m 종목에서 다른 선수들을 압도하며 금메달을 땄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네덜란드 스벤 클라머가 질주하고 있다.
밴쿠버동계올림픽때 우리나라 팬들은 신예 이승훈 선수의 은메달 획득 장면을 보았고, 10,000m에서 큰 해프닝이 벌어졌다. 크라머는 10,000m에서도 12분 54초 50으로 기록으로 골인하여 우승을 예감했지만, 17번째 바퀴에서 제라드 켐커스 코치의 실수로 인코스와 아웃코스를 바꾸어 타는 바람에 실격 처리되어 이승훈 선수에게 금메달을 헌납했었다. 이후 코치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크라머는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에도 함께 출전하게 된다. 대인배다운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대목이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0m가 11일 오후 강원도 강릉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렸다. 대한민국 이승훈이 질주하고 있다.
경기 다음날 마음을 추수린 크라머는 켐커스 코치와 좋은 시간을 가져왔고,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며, 그만한 일로 좋은 지도자와 헤어질 수는 없다고 하였다. 또한 네덜란드 국민들 역시 현지 인터넷 설문조사를 통해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고, 두 사람이 다시 팀을 이뤄 금메달을 따면 된다고 켐커스 코치를 지지하였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더욱 열심히 노력하여 지속적 성장을 이뤘고, 2013년 켐커스 코치는 올해의 지도상을 받게 되었다. 또한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에서도 크라머는 5,000m와 팀추월에서 금메달을 10,000m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오랜 믿음과 의리가 뒷받침된 아름다운 금메달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두 사람은 결별하였지만 9년간 함께 해온 아름다운 인연으로 동계올림픽 역사에 길이 남은 3연패의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계기는 충분히 되었다고 생각된다.
스피드스케이팅 장거리 최강자 스벤 크라머(네덜란드)가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해 기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또한 세계적인 복싱 전설 매니 파퀴아오(필리핀) 역시 그를 세계적인 스타로 키운 프레디 로치(미국) 코치가 있었다. 둘은 무려 15년 동안 링 위에서 손발을 맞춘 사제 지간이라 할 수 있다. 1995년 프로에 데뷔해 유독 방어에 약점이 많았던 파퀴아오는 2003년 로치 코치를 만나면서 세계적인 복서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로치 코치와 함께 복싱 사상 첫 8개 체급 석권의 신화를 만들어 냈고, 로치 코치 역시 내가 만들어낸 복싱 챔피언 27명 중 최고의 선수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2016년 은퇴를 선언하면서 상원의원이 된 파퀴아오가 운동을 그만두고 7개월여 만에 복귀해 패배를 하면서 로치 코치는 운동과 정치를 동시에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비판했고, 이를 계기로 둘은 사실상 결별의 수순을 밝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설이 된 매니 파퀴아오가 로치 코치를 만나지 않았다면 과연 8체급 석권의 신화가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일본 J리그 교토퍼플상가에서 활약중인 박지성선수의 모습.
우리나라 최초의 프리미어리그 선수가 된 박지성 선수 역시 좋은 지도자와의 인연으로 세계적인 선수로 도약할 수 있었다. 박지성 선수가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교두보를 마련해 준 감독은 히딩크 감독도 퍼거슨 감독도 아닌 명지대 김희태 감독이었다. 수원공고를 졸업하는 해에 진학할 대학이 없었던 박지성 선수의 가능성을 눈 여겨 본 김희태 감독은 명지대 축구부의 입학 정원이 모두 차자 테니스부의 노갑택 감독에게 부탁해 테니스 선수 정원을 빌어 간신히 축구부에 입학 시켜 박지성 선수가 축구를 지속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후 1학년을 마치고 더 큰 무대에서 경험을 쌓고,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도록 일본 교토 퍼플상가 구단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도 김 감독으로 박지성 선수 축구 인생의 큰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2002년 월드컵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박지성선수가 개막전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골을 넣고 환호하고 있다.
아시아의 홈런왕인 이승엽 선수도 처음부터 타자는 아니었다. 1995년 삼성구단에 투수로 입단한 이승엽 선수는 왼팔꿈치 수술을 받아 투수로서의 성장 가능성에 의구심이 있었고, 대성할 선수로 평가받지도 못했다. 당시 삼성의 우용득 감독과 박승호 코치의 제안으로 당분간만 타자로 전향해 보자고 권유를 하셔 훈련을 시작했다. 이후 96년 백인천 감독님을 만나 본격적인 타격 훈련이 시작됐고, 백 감독은 이승엽 선수에게 일본 스타일의 날카로운 스윙을 가르쳐주었으며 이승엽 선수는 남다른 타격 훈련을 통해 97년 역대 최연소 홈럼왕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99년 54홈런, 2003년 아시아 최다 홈런인 56개를 기록해 야구의 전설로 등극할 수 있었다. 은퇴를 하였지만 그는 항상 내 실력이 뛰어난 것이 아닌 좋은 지도자를 만난 덕분이라는 마음가짐과 나이가 들어가도 나태해지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오랜 동안 모범적인 야구 선수로서의 롤 모델을 만들어 가는데 그 역할을 다 했다.
전설의 4할타자인 백인천 감독이 삼성라이온즈 감독시절 승리 후 팬들에게 환호하고 있다.
삼성라이온즈 입단 후 타자로 전향하여 아시아의 홈런왕이 된 이승엽선수.
이렇듯 국내에도 선수와 지도자의 아름다운 만남이 많지만, 일부 종목에서 알려진 선수와 지도자의 불화로 얽혀진 관계들을 미디어를 통해 종종 듣게 된다. 대업을 위한 과정과 시간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선수와 지도자 모두가 서로를 믿고, 진정성 있는 관계를 유지해야 좋은 성과 역시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좋은 지도자와 선수가 오랜 믿음으로 아름다운 결실을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만남이 더욱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김진국 전문기자 / navyjk@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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